함께 일하고 있는 건실한 청년 신 선생에게 물어봤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신 선생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가톨릭 신자라서 성호를 긋고 있는데 혼자 뻘쭘할까 싶어서 성당 나가 볼 생각이 없는지를 말입니다. 

신 선생의 답은 “저는 그냥 저를 믿습니다” 였습니다. “네, 관심있어요” 정도의 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가톨릭 수도회가 설립하여 가톨릭의 정신으로 운영하는 학교에서 가톨릭 사제가 부서장으로 있는 근무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최소한 점심도 같이 먹고 경우에 따라 몸 쓰는 일도 같이 하는 동료의 종교에 조금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듯합니다. 

매우 단편적이긴 하지만 신 선생이나 다른 청년들 중에 적잖은 이가 종교의 집단적 성격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냥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위안이 될 것입니다. 결국, 종교에서 주는 위안이나 맘 편히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이가 주는 위안이나 별 차이 없다는 이해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이겠죠.

여기에 최근 들어 교회라는 제도에 대한 거부감, 그 구성원들에게서 느껴지는 심한 반감, 더 심하게는 혐오감까지 더해졌습니다.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보다 사회에 해악의 원인이요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가는 듯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코로나19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교회에 왜 모입니까?’ ‘바이러스 감염을 없애고자 온라인으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면 이런 방법이 앞으로더 훨씬 더 안전한 거 아닌가요?’ ‘오히려 온라인으로 만나는 게 성당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줄여 줘서 좋지 않나요?’ ‘마음의 평화는 친구들과 있을 때 더 느껴지지 않나요? 등등.

독자 분들도 얼마든지 다양한 질문을 던져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 진지하게 대면할 때 오늘의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무리 공동체보다는 개인 차원으로 신앙생활이 흘러가는 경향을 보여 준다고 해도, 적어도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인 나 사이의 숙명에 대해서는 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성격이 다른 이웃종교는 나름대로 답을 구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이 단독자로서 설명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일까요?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협조자 성령이 구별되면서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우리는 “관계”를 배제하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이웃이 관계 안에서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입니다. 

실제로 교회에 다니고 말고는 언뜻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애초에 내 삶에 펼쳐졌던 초대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초대에 응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웃과 맺는 건강한 관계를 배워 볼래?” 하고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코로나19와 상관없이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 신앙에서 “관계”를 뺄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연결되어 “연대”, “헌신”, “투신”, “책임” 등이 자연스레 떠오르네요. 저만 이러는 걸까요?

우리를 초대하신 하느님을 묵상하는 한,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세상 안에서 봉사하는 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센터장, 인성교육원장,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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