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34,4ㄱㄷ-6.8-9; 2코린13,11-13; 요한3,16-18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325년)와 콘스탄티노플(381년) 양자 공의회를 거쳐 확정되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한 조목마다 이단에 맞서 신앙을 보호한 교회의 지난한 투쟁을 엿보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실체(ὁμοοὐσία)이며 동시에 세 위격(ὑποστάσις)을 지닌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체성이 달린 근본적 가르침이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느님에게 종속된 존재로 규정했던 아리우스 이단에 교회가 무방비 상태로 끌려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무려 네 명의 황제들(Constantinus, Constantius II, Julian the Apostate and Valens)과 격돌하면서 니케아 신경의 정통성을 지켜냈다. 그는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와 도피, 귀향을 반복하면서 투쟁 일변의 생을 보냈다. 왜 그는 쉬운 길을 두고 이토록 지난한 생을 보냈을까?

아타나시우스가 그렇게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일 아리우스파의 주장대로 하느님만이 유일신이고 예수와 성령은 신적 본질이 아닌 ‘종속체(유사체)’로 정의됐다면, 지금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찌 되었을까? 성자는 유사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유사체 역시 숭배 가능한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자체가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혁명적 메시지는 퇴락했거나 다른 형태로 변질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오늘날 인류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근현대 헌법에 녹아있는 인간의 기본권, 평등과 자유, 박애의 근본 가치가 제대로 보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예수가 흔들렸더라면 성경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법정 최고의 신성한 권력도, 그나마 이룬 인류문명의 진보도 담보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많은 오류를 헤쳐 오면서도 면면히 흘러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진리)를 함부로 부정할 사람은 없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통한 방법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살피는 일이다. 초대교회는 개념적으로 신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거친 역사로부터 체험된 신을 믿고 고백했다.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신 개념은 삶의 현장과 분리될 수 없는 일이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 역시 예수와 함께 한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삶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접근하게 된 데에는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서 가능했다. 초기 교회는 성부와 성자, 성령에 따른 신앙고백이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교단과 장소에 따라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고 고백하는 양식에 차이가 났다. 그리스적 사고방식이 뒤섞이고, 복잡한 정치, 지리적 환경이 겹치면서 교리 논쟁이 교회분열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행히 초대교회의 모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교회는 모두 다음과 같은 면에서 동일한 본질이요 삼위인 것이다. 모세가 저 유명한 십계 판을 들고 산에 오르던 날, 주님의 첫 마디는 ‘계명’을 명령하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34,6) 요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본질을 계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공동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축복한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13,13) 

삼위일체로 복원된 새로운 신앙고백은 공동의 집 지구를 살아나게 하는 일이며,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는 일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이처럼 삼위일체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신, 사랑과 친교의 신”이었다. 그래서 삼위요 일체이신 하느님이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희가 살기를 원한다면, 절대로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누구를 왕따시켜서도, 단절해서도 안 된다. 온 우주 만물 어느 것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것이다. 생명은 핏줄로 이어져야 살 수 있듯이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되어야만 살 수 있다. 작은 실개천도 더럽히지 말라. 개천이 죽으면 강과 바다가 죽을 것이고, 집짐승과 들짐승, 하천과 강,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을 것이다. 마침내 인간도 따라 죽을 것이다. 너희가 지구를 살리는 일은 지구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와 너희 후손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삼위일체에 대한 근본적 배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창조된 모든 것을 효용 가치로 여기는 탐욕적 인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치, 경제, 지식, 언론, 종교를 불문하고 고루 퍼져 있어서 온 지구를 오염시키고 망가트린다. 이것이 아리우스적 이단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삼위가 사랑으로 낸 지구의 생명체를 학대하면서 어찌 그를 경외한다고 고백 할 수 있는가?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고 멸종으로 치닫게 하면서 어찌 기독교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을 지키고자 했던 4세기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삼위일체로 복원된 새로운 신앙고백은 공동의 집 지구를 살아나게 하는 일이며,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는 일이다. 그들이 관계하는 신비적 삶의 방식을 훼손하지 않았더라면, 팬데믹도 기후 위기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더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 불가의 신으로 내몰 일이 아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신이 다시 있으랴.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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