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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승천, 단절과 시작5월 24일(예수 승천 대축일) 사도 1,1-11; 에페 1,17-23; 마태 28,16-20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뜻’이든 ‘하느님나라’이든 예수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을 연속시키기 위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가 이룩한, 그러나 여전히 이루어야 하는 ‘하느님나라’는 그날 비로소 제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만일 승천이라는 단절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자들은 예수의 아우라에 갇혀 더 이상의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스승의 화려한 명성에 취해 체포와 구금, 고문과 사형으로 스러진 예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유혹으로 포장되었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들은 이래저래 예수의 ‘키즈’로 불리는 일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예수의 일은 끝내 무효화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넘어온 단절을 경험했듯이 다시 세상을 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단절을 감행한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슬퍼하겠지만 떠나감이 결국 새로운 출발(성령 강림)이 되는 필연적 귀결임을 곧 깨달을 터다.

예수를 물질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은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모든 우상적 시도와 단절하는 일이다. 예수는 이런 단절이 결심한다고 해서, 의욕이 충천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한 제자들은 지금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적기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의 어조가 사뭇 비장하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1,6) 그러나 돌아온 예수의 응답은 제자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힘을 받아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6-8) ‘성령’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 키워드다. 예수가 지상의 삶을 매듭짓고 떠나는 이유는 모두 새로운 영을 수혈받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서게 하기 위함이다. 땅끝까지 증인으로 나서야 한다는 소리는 예수로부터 목격한 모든 것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을 운명까지 떠안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떠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 맞다. 낡아빠진 정신으로 세상을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떠나감(승천)이 진행되고 나서야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영웅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이 아닌 스승의 관점을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았다. 성령 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후 제자들은 급격하게 다른 사람들이 되어 갔다. 베드로는 정오 환시인 짐승들의 바구니를 통해 낡은 율법의 세계와 떠날 채비를 하였고,(사도 10,9-16) 예루살렘 공의회는 구시대의 익숙함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율법의 도약을 이루어낸 변혁의 발판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면 할수록 구시대의 율법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두 제자들이 스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혁신적으로 변모시키게 된 것이다. 이런 시도들은 승천과 성령 강림, 단절과 연속을 이루는 결정적 계기로 이어졌다.

'예수 승천'(중간 그림), 베아토 안젤리코. (이미지 출처 = it.m.wikipedia.org)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지구촌과 한국 사회도 지금까지의 문명을 청산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서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불씨들이 들불처럼 번져서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힘으로 이어질 수 없는 단절은 또 다른 파괴의 다름 아니다. 수 세기 동안 문명의 개척자로 자처해 온 시장 자본주의가 실은 야누스의 두 얼굴이었다는 것을, 복음을 전파하고 종교처럼 굴었던 그들이 실상은 천하를 집어삼킨 괴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위험한 동거를 감지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감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구촌은 학대에 길들여진 여인처럼 ‘무기력’한 채 가해자의 손에 자신을 내맡긴 형국이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습된 무기력’ 때문일 수 있고, 그래서 살 길을 눈앞에 두고도 저항 한 번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일 수 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온몸에 베인 탓이다. 인류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당한 지구도, 지구인들도 모두 그렇게 벼랑 끝에서 제 몸을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도 다른 살길을 찾지 않는다면 이는 틀림없이 집단 무기력증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팬데믹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생의 전투 의지를 상실한 무기력증이다.

교회 역시 단절과 이행이라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성령으로 만인에게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는 예수의 지상명령은 새로운 인류를 일으키라는 강렬한 요청이다. 이 말은 기계적으로 세례받은 신자 수를 늘리라는 소리가 아니다. 파괴적 패러다임에서 창조 본래의 패러다임으로, 생태통합적인 패러다임으로 이동시킬 일꾼들을 소집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때마침 문헌, '찬미받으소서'가 반포 5주년을 기념하는 글로벌 캠페인(5월 16–24일)을 시작했다. 교황은 문헌이 미래의 세대들에게 물려줄 세상을 위해 쓰여졌음을 밝히면서 세상의 근본적 문제들을 위해 치열하게 다뤄 줄 것을 호소한다.(160항 참조) 그는 캠페인 주간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저는 다시금 긴급히 호소합니다. 생태 위기에 응답하십시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조물을 돌봅시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후 정의!”, “기후 정의가 언제 실현되기를 바랍니까? 지금!”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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