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주의, 변화 이야기

전례력으로 새해인 대림 첫 주, 오늘부터 청년 칼럼 연재가 시작됩니다. 첫 시작은 장성렬 필자의 '언제나 시기상조'입니다. 6주마다 정치사회 전반 및 퀴어/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운동 측면에서 폭넓은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년의 눈으로 다룹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장성렬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나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 하면 생각나는 가치로 자유와 평등, 공정함이나 장 자크 루소의 공공선 개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한편,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제도가 있는 체제’라고 정의했는데, 민주주의는 그렇게 특별한 체제가 아니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생각보다 간단한(?) 조건이 충족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건 간에,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그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조건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비민주적인, 심지어 권위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거나, 그런 정치인들이 당선되거나, 혹은 민주주의적 시도들이 점차 붕괴되곤 하는 경우들도 나타나는데요. 그만큼 민주주의는 이행하기도 힘들고, 지켜내는 것은 더 힘든 정치체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어떠한 양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민주화에 대한 시도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정부, 즉 다원주의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인정하지 않는 체제에 대한 ‘사회적 도전’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권력에 대항하는 ‘규모화된 사회적 도전’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아무래도 홍콩의 민주화 투쟁일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홍콩 – 민주주의로 가는 험난한 도전

2014년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직선제를 요구하며 벌어진 이른바 ‘우산혁명’에서 홍콩 시민들은 사실상 중국의 괴뢰정부 수준인 홍콩 정부의 민주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 항쟁을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9년 다시 싸움에 불이 붙었는데, 시위대는 범죄자, 특히 사상범을 홍콩의 모국인 중국으로 보낼 수 있는 송환법의 폐기와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더 나아가 행정수반인 행정장관의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다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투쟁은 무척이나 빠르게 확산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대자보를 붙이고 헬멧이나 마스크 등 필요한 물품을 보내거나 연대 집회를 여는 등의 국제적 연대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화 요구에, 홍콩과 중국 정부는 ‘강경 진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홍콩 경찰은 색소 섞인 물대포와 곤봉, 최루탄과 최루액 등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실탄을 발포해 중태에 빠지는 시위 참여자들도 생겨났는데요.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복면금지법’ 또한 위헌이라는 고등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발효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중순에 들어서는 경찰특공대가 자동소총을 휴대하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실탄이 장전된 탄창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홍콩 시내를 활보하는 모습 또한 여러 번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시간으로 11월 18일엔 경찰의 이른바 ‘폭도 진압 부대’가 시위의 주 거점 중 하나인 홍콩 이공대학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은 1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는데 경찰은 심지어 구급대와 기자들까지 체포했습니다. 이에 동아시아국제연대는 19일 오후 2시 기준으로 ‘지난 24시간 동안 20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체포되었고, 이공대학 학생도 500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11월 29일 현재 소수의 인원만이 이공대를 사수하고 있고, 그나마도 외부에 SOS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현실적으로, 힘 대 힘의 싸움에서 민주화 세력이 비이성적인 공권력을 상대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사실상 극도로 불리한 상황인데, 공권력은 비이성적이고 비인도적인 방법을 써서 시위대를 제압하곤 합니다. 심지어는 체포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들-홍콩 정부는 이들 모두를 ‘자살’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특히 청소년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영상에서 유서를 읽거나,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 같은 신상정보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영원히 사라질까 봐, 자신은 ‘자살당하지 않는다’ 는 의미에서 자신의 정보들을 -심지어 끌려가면서도- 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산혁명의 주역이자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인 청년활동가 아그네스 초우와 조슈아 웡 등은 세계에 연대를 호소했고, 한국에서도 홍콩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붙기 시작했고, 그러자 중국과 친중 세력은 ‘사상전’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홍콩의 상황을 두고 ‘소요’나 ‘폭동’이라고 호명했고, 당장 한국에서는 각 대학의 중국 유학생들이 홍콩 연대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홍콩은 중국의 영토다(HK is part of China)”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다니기도 한 것입니다. 대학 밖에서 홍콩을 지지하는 집회를 방해하기도 했다. 유학생들을 감시하는 중국 공안의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 또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홍콩에 대한 국제적 연대를 끊어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2019년 9월 29일, 홍콩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립하고 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

그렇다고 홍콩의 앞날이 대책없이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최근 치뤄진 기초선거에서 게리맨더링(선거구 조작)에도, 홍콩 자주파가 친중파를 압도하는 결과가 나왔는데요. 이는 비록 기초선거이긴 하지만 이는 홍콩이 중국의 기울어진 민족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투표’라는 민주주의적 장치에서도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하나의 ‘사건’ 이었습니다. 물론 이 선거로 중국의 일국양제 정책이 멈추고 기울어진 민족주의의 추가 가운데로 돌아오는 일은 –적어도 당장은– 보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홍콩이 중국과 더 이상 ‘하나’가 아니고, 홍콩은 이미 ‘하나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에서 독립한 민주적 정치공동체라고 선언한 이 사건(그리고 이 사건이 있기까지의 과정들)은 홍콩 스스로, 그리고 홍콩에 연대하는 많은 이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거대한 활력(elan)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시도하는 것도, 또 지켜내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이제 시작된 홍콩의 민주주의가 위협받지 않거나, 스스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느 곳에도 없고요. 하지만 우산을 들고 일어난 홍콩의 민주화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민족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부터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고, 그와 동시에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비민주적 움직임들에 경종을 울리는 커다란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의 민주화 투쟁이 이루어 내야 할 것은 민주화/독립을 완수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지켜 나감에 있어서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모습들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콩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라는 것은, 만일 홍콩의 민주화가 좌절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그다지 안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홍콩 민주화 투쟁에 응원과 연대를 표하는 홍콩의 친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콩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싸움을 승리하리라는 희망, ‘하나의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기울어진 거대 담론을 벗어나 독립된 민주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물론 그 희망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도 넘게 넘어져야 닿을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홍콩의 시민들은 일흔일곱 번도 더 넘어지고 다쳐 가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극적 현실에 처해 있지만, 희망과 조금씩 생겨나는 변화가 조금씩이나마 활력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분명 홍콩의 독립이나 민주화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국의 오랜 지배를 겪고 바로 얼마 전에야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고요. 하지만 모든 변화는 ‘언제나 시기상조’였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도, 아랍의 봄도, 세계적으로 ‘대세’가 된 동성결혼 합법화도, 학생인권 조례도, 결혼이주 여성의 정계 진출도, 심지어 낙태죄 폐지도 모두 ‘시기상조’라는 평가를 정면으로 돌파해 ‘변화’가 되어 왔습니다. 시기상조라는 편견이 만든 성벽은 무척 단단합니다. 그런데 그걸 깨기 위해 일흔일곱 번 넘게 노력해 온 사람들 덕에 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늘 ‘시기상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벽에 부딪혀 왔고, 단일하지 않은 여러 모습들을 갖추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의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민주주의가 결국 도전을 이겨낸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굴복하고 민주주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곳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자 홍콩의 친구로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테르미도르(반동)를 지적하고 막아내야 합니다. 단편적으로는 홍콩의 민주화를 반대하는 이들부터, 더 넓게는 서로의 이웃과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시기상조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모든 변화가 시기상조라는 말은, 곧 그 어떤 변화도 시기상조가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장성렬(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정치학과 사회학을 배웠고,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있다. 권위와 폭력을 늘 경계하고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해 글 쓰며, 비슷한 주제로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청년담론> 평등문화위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