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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악의 연대에 맞서는 시대정신을 위하여[언제나 시기상조]

여기, ‘텔레그램 n번방’(이하 n번방)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 아니 ‘사건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요약하면 보안이 강력한 메신저인 텔레그램의 비밀 대화방 기능을 이용해 불법촬영물이나 성착취물 등을 공유하거나 매매해 온 사건이었습니다. ‘n번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불법촬영물이나 성착취물이 유통되는 텔레그램 대화방이 다수였고, 1번, 2번, 3번 등 번호가 매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에는 ‘박사’라는 닉네임을 쓰는 운영자, 그러니까 얼마 전 구속된 조주빈이 있었고, 그에게 100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조주빈이 운영하던 방외에도 ‘갓갓’, ‘부따’, ‘이기야’ 등 다른 닉네임을 쓰는 동업자들이나 유사한 방을 운영하던 범죄자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하고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 그리고 무려 26만 명에 이르는 n번방 참여자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크고 심각한 사건입니다.

n번방에 대해 그냥 ‘야동’이 유통되는 비밀 대화방쯤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동’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남자’ 사회에서 야동은 무척 쉬운 농담거리로 소비되고, 코미디의 소재가 되거나 음악에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MBC> “무한도전” 방송 초기에 유재석 씨의 ‘빨간 비디오’ 농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야동’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가장 흔하게 소비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이성애자) 포르노그래피 중에는 불법촬영물 혹은 폭력과 협박 등으로 만들어진 성착취물이 무척 많습니다. 먼저, 불법촬영물에는 흔히 XX녀, OO녀 등의 이름으로 유통되는데요, 여성의 신체 특징이나 카메라에 잡히는 주변 사물의 특징을 따서 이름 붙여지곤 합니다. 물리적/정신적 피해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은 거액의 돈을 내고 ‘디지털 장의사’를 고용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결정하거나, 심지어는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n번방에 입장했던 사람 중에는 ‘실수로’ 들어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말을 믿어줘야 할까요? 아뇨,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실수로’ 텔레그램을 설치하고 ‘실수로’ 조주빈에게 100만 원이 넘는 돈을 그것도 비트코인으로 송금하고, ‘실수로’ 들어간다고요? 차라리 제가 물 위를 걷고 말겠습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미지 출처 = 여성가족부)

‘일탈계’와 청소년 성착취

큰 충격을 주는 부분 중 하나는 n번방의 피해 여성 중 많은 수가 청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탈계’ 라는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일탈계’는 트위터 등의 SNS에서 (주로) 청소년이 자신의 ‘일탈’ 행위를 올리는 계정을 만들고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탈’은 신체의 노출이나 섹스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거나 조건 만남 등을 시도하는 등의 양상을 지닙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그런 걸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성 청소년의 ‘일탈’은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라는 말에 가려진 청소년의 성적 욕구의 불충족, 경제적 불안정 등 현실적 욕망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고, 충족할 수 있는 길 또한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은 생산이나 소비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들의 욕망은 터부시되기 마련이니까요.

조주빈과 공범자들은 바로 그 지점을 노렸습니다. ‘일탈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청소년 당사자들에게 조건 만남을 할 것처럼 접근하거나 그 계정을 해킹해 인적 사항을 알아내는 방법, 그리고 경찰을 사칭해 ‘부모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속해서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갈취하고 심하면 강간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무력화시키고 지속해서 가해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은 피해자들을 조금도 돕지 못했습니다.

왜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고요? 저는 조주빈을 비롯한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규율’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가해자들이 경찰을 사칭해 ‘부모와 학교에 알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사진과 동영상들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정서적으로 고립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을 보호해야 할 경찰과 부모, 학교가 피해자가 당한 ‘폭력’을 ‘폭력’이 아닌 ‘음란’이라고 명명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탓할 것이라고 피해자에게 가스라이팅(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 행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그들은 청소년의 ‘일탈’을 문제 행위로 받아들이니까요.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규율은 인간을 개인으로 분해하고 각 개인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효율성 상승을 위해 시공간, 힘, 행위를 분해하고 조직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몸은 규율, 즉 의도가 각인되고 권력의 어떠한 작용이 드러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푸코 철학에서 규율과 훈령이 목표로 하는 것은 마치 기계 같은 ‘길들인 몸’을 만드는 것인데, 규율은 특정 공간에서 특정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특정한 주체를 재탄생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조주빈과 가해자들은 주된 피해자들인 여성 청소년을 규율해, 자신들의 요구를 수행하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피해자들을 스스로 규제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르도록 무형의 ‘판옵티콘(감시와 규율 panopticon)’에 가두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착취라는 이름의 거대한 ‘산업’

4월 5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성착취 산업의 규모는 커피 산업의 4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성매매나 성매매 알선, 변종 성매매 업소, ‘벗방’을 비롯한 성인방송,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크기는 규모조차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2010년 여성가족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성매매 거래액은 6조 6367억 원에 이르고, 미국 암시장 전문 조사기관 하보스코프닷컴(www.havoscope.com)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2015년 기준 120억 달러(약 14조 8000억 원)로 세계 6위에 이릅니다. 성착취 시장을 이루는 그 외의 부분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고요. 심지어 숙박업소 중개 사이트와 웹하드 카르텔이 불법 촬영을 통한 ‘동맹’을 맺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라넷’을 기억하시나요? 하루 광고비가 1억 원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던 성착취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적어도 표면적으로 소라넷은 폐쇄되었지만, 그 잔재들은 인터넷에 깊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성인 사이트나 성 매수 정보, 후기 사이트들이 법망을 피해 영업하고 있고 거기에선 성착취물이나 데이트 강간 약물 등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습니다. 해외의 포르노그래피 사이트에서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생산된 불법촬영물이나 성착취물이 무척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고 합니다. ‘박사방’등이 인기 검색어에 올라와 있기도 하고, 한국인 회원이나 이용자 수도 엄청나고요.

3월 26일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 해결책을 요구하는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 모습. ⓒ배선영 기자

n번방, 거대한 악의 연대기

조주빈은 체포되면서 ‘내 안의 악마를 멈춰줘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건 반성이 아니라, 봐주기 힘든 수준의 자기연민이고 피해자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지금까지 여성과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수억 원의 돈을 부당하게 챙긴 게 악마가 한 일인가요? 아뇨, 조주빈과 그 공범자들이 한 일입니다. 자기 안에 악마가 있다는, 저 비대한 자의식은 수많은 피해자를 판옵티콘에 가둘 수 있었고, 자기가 아니어도 이런 짓을 얼마든지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 가담자들이 모여 ‘내가 박사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대화방을 만들었다는 게 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나’가 아니고 ‘우리’이며, ‘혼자’가 아니라 ‘다수’라는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에, 또 한국의 성범죄 처벌은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마 운운하는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거대한 ‘악의 연대’, 즉 ‘레기온’(Legion)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탈식민주의 연구자이자 페미니스트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subaltern, 하위 주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한국에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은 지금까지 서발턴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인공임신 중단(낙태)은 작년에야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고, 웹하드 카르텔의 황제였던 양진호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김학의는 무죄, 정준영은 벌금 100만 원 판결을 받았고, 승리는 군대로 도주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불법촬영물 피해자들이 한국을 등지거나 세상을 떠났고, ‘일탈계’를 만들었던 청소년들은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서발턴들은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누군가가 죽고 절망해도 사회의 인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그냥 떴다 저무는 이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공통의 시대정신’을 위하여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연기되지 않는다면 다음 주 수요일에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수십 개의 정당과 셀 수도 없는 후보자들이 이번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가담자만 26만 명에 이르고 현직 군인, 사회복무요원, 공무원 등이 주범으로 있는 거대한 범죄 사건인 이 ‘n번방 사건’을 언급하고, 해결해 나가겠다고 이야기하는 정당은 소수의 진보정당과 그 외 몇 명의 후보자들뿐입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늘 그랬던 것처럼 몇 명을 빼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태도를 지키고 있을 뿐이고, 미래통합당을 비롯한 보수정당들은 뭐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선거에서 이 거대한 ‘악의 연대기’를 언급하는 이들이 적다는 건 무척 슬픈 일입니다. 정쟁의 요소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니요.

그래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권에선 정말 한 줌의 사람들이지만요. 누군가에게 표를 줄 거라면, 적어도 정당투표에선 이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한 표라도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시작하지 못하면 또 다른 n번 방, 또 다른 조주빈이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고,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피해자들을 돕고, 궁지에 몰린 이들을 보호하고, 청소년 성착취와 불법촬영물의 유통을 막고, 본질적으로 가해자들을 일망타진하고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지금 여기 민주공화국인 한국에 필요한 ‘공통의 시대정신’일 것입니다.

장성렬(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정치학과 사회학을 배웠고,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있다. 권위와 폭력을 늘 경계하고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해 글 쓰며, 비슷한 주제로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청년담론> 평등문화위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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