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1월 17일(연중 제33주일) 말라 3,19-20ㄴ; 2테살 3,7-12; 루카 21,5-19

지난 9월 ‘유사종교현상과 사목적 배려’라는 주제로 교구 사제 연수가 있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소위 신천지 현상 전에도 이러한 유사종교에 대한 피해는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왔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돌아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유사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극적 성경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단체의 이익을 위해 폄훼하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장면이나 사도들의 권고,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서들의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부 구절만 발췌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 매우 익숙한 것이 그들의 방식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봉독하는 독서와 복음의 단락은 '매일미사'를 만드는 분이나 몇몇에 의해서 임의로 결정되고 생략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미사 경본’과 그 지침에 따라 총 4권으로 이루어진 미사 독서에 따른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입맛에 따라 특정한 구절을 빼거나 넣는 것은 말씀의 전례에 임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이용해 신천지를 비롯 이와 비슷한 유사종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장 큰 주제는 바로 종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종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지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성경을 편집하여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주입하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이번 주일 1독서에서 구약의 마지막 책을 만납니다. ‘말라키’. ‘나의 사자, 나의 천사’라는 뜻을 가진 이 책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말라 3,19) 그러나 그 마지막은 ‘무'(無)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 전통이 말라키 예언서를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빛을 보았듯 종말은 또 다른 출발을 알립니다. 그러기에 1독서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라고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이미지 출처 = Pxhere)

복음으로 배치된 루카 복음 21장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직전에 두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도 마지막 순간에 벌어질 ‘없어짐’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이 말씀을 시작으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맞아야 될 우리의 자세를 복음 말씀을 통해 상세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요란을 떨 필요도 없고 맹목적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라보기에는 무섭고 걱정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부로 남의 뒤를 따르지 말고(루카 21,8 참조) 당신만을 바라보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하고 당부하십니다. 

인내로써 얻는 생명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실 진정한 의미의 종말의 참뜻이며 새로운 시작인 셈입니다. 그러기에 종말은 또 다른 새로움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막연한 두려움과 심판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움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남겼던 “모든 새로움은 종말에서 출발한다”라는 말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단순한 물리적인 끝이 아님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는 특별함이나 요란함보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인내를 통한’ 묵묵한 기다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덧 11월의 한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계절도 그러거니와 교회의 전례력도 우리에게 여러모로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 신앙 안에 녹아 있습니다. 동시에 나의 마지막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되는 때입니다. 점점 빨리 지는 해, 세지는 바람과 떨어지는 낙엽을 보노라면 장소와 나이를 불문하고 나의 마지막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펼치게 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들을 통해 살펴본 우리 모두가 맞을 마지막에 대해서도 한 번 묵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주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희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연중 주일 감사송3)라는 하느님을 향한 교회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