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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유상우 신부] 11월 3일(연중 제31주일) 지혜 11,22-12,2; 2테살 1,11-2,2; 루카 19,1-10

이번 주일의 복음은 주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사람들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0,7) 하며 투덜거렸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죄인이라고 ‘단정 지어진’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복음서에서 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실 때, 함께 자리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보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 7장에서도 주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실 때 죄인인 여자가 다가와서 그분의 발을 씻으니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루카 복음 15장에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고 투덜거립니다. 분명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당대의 지식인이자 지도자였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그다지 곱게 보이지는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11,26)라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죄인들도 사랑하시기에 그들 곁에 머무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어두운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교의 헌장 9항)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천명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완전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곳은 아니거니와 교회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둡고 불완전한 그곳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일찍이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복음의 기쁨' 49항)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될 교회의 모습은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같은 항)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이미지 출처 = Pxhere)

결국 교회 안에서만 거룩함과 의로움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세상 속으로 달려들어가 그 속에서 주님의 구원소식을 전해야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을 복음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르 2,17)와 같은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모습을 닮아 아프고 희망이 없는 그곳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듯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곳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성화시켜야 할 임무가 있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에게만 유보된 것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신도들은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하여 실제로 사도직을 수행한다. 이렇게 평신도들은 그 활동으로 현세 질서 안에서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증언하며 인간 구원에 봉사한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2항)라고 이야기하며 세상 속의 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신학교 1학년 때 읽었던 "교회- 순결한 창녀"라는 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 역시 자캐오처럼 주님과 함께할 때에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죄인임도 자각해야만 합니다. ‘죄인들의 피난처’(Refugium Peccatorum) 교회가 성모님께 드리는 호칭 중 하나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쁘레시디움 호도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명칭이기도 하지요. 거룩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모님의 간구를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성모송이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살아 있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죄인으로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될 존재들입니다. 죄인이지만 거룩한 공동체에 머물고 있는 신앙인.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자캐오를 찾아가신 것처럼 ‘거룩해져야 할 곳’으로 찾아가야만 합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뜻을 살피며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지혜 11,23)라는 제1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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