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라틴아메리카는 거의 모든 나라들의 정치형태가 포퓰리즘적이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는 물론이고 그 외의 나라들도 그렇다. 최근의 사례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과 브라질의 볼소나로 정권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두 정권의 이데올로기는 매우 다르지만 포퓰리즘 정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원천적 이유는 계급문제가 첨예할 만큼 공업화가 안 되어 있고 소수 기득권 계급/다수 대중의 구조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정당도 그렇게 힘을 쓰지 못한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좌파 정당도 대중이 아닌 지식인 엘리트들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대중이 정치적 변혁의 중요한 순간에 역사적 전환을 이루는 중심주체가 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엘리트가 중심적 역할을 많이 했다. 과거에 학생운동권도 분명히 엘리트 계층이었다. 최근에는 흔들리고 있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이 중심주체로 출현하는 이유는 이들이 과거부터 내려오는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문화(구어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연대의 문화(예를 들어, 공동체의 축제, 춤, 음악, 음유시인적 시, 영화 등)가 강한 이유다. 구어 문화는 점잖게 표현한 것이고, 다른 표현으로 '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얘기도 된다. 우리는 이에 비해 1970년대 개발독재 이후 그리고 1997년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개인들이 외롭게 파편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들 대중은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과거 조상의 지혜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 또한 거주 공간이 공동체화 되어 있어 무슨 일이든 집단적 항의와 요구를 쉽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재건축의 경우, 자주 세입자들이 폭력적 퇴거를 당하고 가끔 좌절하여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불상사가 나곤 하는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 사회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무조건 라틴아메리카는 지도자가 대중에게 인기 영합하려고 ‘퍼 주기’를 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하면 베네수엘라처럼 된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많은 이의 연대가 나라를 살릴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ublicdomainpictures.net)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은 1943-55년까지 집권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바르가스는 1930-45년, 멕시코의 라사로 까르데나스는 1934-40년 집권했다. 이 시기를 유심히 보면 흥미 있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은 체제의 위기에 변혁을 이끄는 정치 형태이기 때문이다. 1930년은 세계 대공황의 시기였고 1940년대는 유럽에서 파시즘과 2차 세계대전으로 극도의 혼란기라서 유럽 외 다른 지역에 대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장악력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 사회학자로 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 사회주의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현대 정치사상가들 중 우리 나라에서 인기 많은 학자로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지젝은 유럽인이다. 그래서인지 라클라우는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지만 현대 포퓰리즘 이론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포퓰리즘이 부정적 이미지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포퓰리즘은 일반적인 “정치의 논리(이성)”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제도적 정치와 여론지지의 논리가 아니라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깊게 하는 ‘정치적인 것’의 출현을 말한다. 이런 주장은 라클라우 외에 프랑스의 랑시에르가 언급하고 있다. 아무튼 거의 모든 정치가 포퓰리즘이라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주장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와의 조합이 가능하다. 극좌부터 극우, (신)자유주의, 파시즘 등이 모두 포퓰리즘과 결합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의 포퓰리즘 즉, 지도자가 대중의 여론을 조작, 선동, 동원하는 것, 라클라우는 이것을 “가짜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인가? 급진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즉, 어느 사회의 가장 약하고 배제당한 사람들(가장 가난한 사람들), 우리의 경우 얼마 전 희생당한 고 김용균, 그리고 지금도 여러 군데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생명이 매일 스러지고 있는 비정규 하청 노동자들. 라클라우는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항의하고 저항하더라도 다른 사회 그룹의 여러 요구들(예를 들어, 여성의 젠더 차별 폐지 투쟁, 가난한 노인들, 장애인들의 복지 요구, 청년들의 취업 요구, 집 없는 사람들의 주택권 요구, 기후 위기에 대한 정부의 적극 대책을 요구하는 생태 운동 그룹들....)과 연계하여 저항하지 않으면 포퓰리즘이 출현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 사회에서는 1930-50년대 이후, 다시 1990년대 이후에 이런 종류의 포퓰리즘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50년대 중반 이후에 그렇지 못했던 것은 군부독재의 억압 때문이었고, 90년대 이후 다시 출현한 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기득권층이 대중의 상당수 가난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배제’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기득권층의 공격에 대해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곧바로 저항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이질적 집단들이 연쇄적으로 연대하여 아주 커다란 대중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구어 문화’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현재처럼 개별적으로 파편화된 모습을 극복하고, 약자들이 서로 광범하게 연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몇몇의 진보 엘리트가 출현하더라도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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