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일본의 공격'을 극복하는 대안

현재 뜨거운 이슈인 ‘조국사태’와 ‘일본의 공격’은 서로 다른 사건인 것 같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세계체제가 흔들리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 이슈에 대한 대응에 있어 관행적 진영논리(민주/반민주 등) 또는 그동안 경험해서 익숙한 적대적 경계선(예를 들어 민족주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친다면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진보 엘리트들은 앞으로 미로에 빠질 것 같다. 왜냐하면 두 이슈 모두 보다 커다란 시대 변화와 연관된 매우 징후적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가 흔들리면서도 아직 건재한 데서 오는 불안과 유동성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자기(가족을 포함하여) 계발의 합리적 선택의 길과 경제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배제되는 그룹과의 진정한 연대를 통한 변혁의 길 사이의 충돌 또는 미, 중의 전략적 갈등으로 인한 세계적 수준의 지정학 구조의 흔들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세계체제는 장기적으로는 16세기 이후 형성된 것이지만 현재와 직접 연결된 시각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내부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1945년에서 대략 1970년대 중반까지 산업화체제였다면 그 뒤부터 현재까지는 글로벌 금융이 중요한 신자유주의체제다. 정치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냉전체제의 해체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둘러싸고 지지의 흐름과 반대 흐름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렇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동일한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소위 근대성(자본주의)체제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레타 툰베리가 상징하듯이 기존의 500년 아니 1000년 이상의 근대 자본주의체제와 전혀 가치관이 다른 생태주의적 전환의 비전(일부 현실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비전이다) 사이에 중요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즉 기후변화로 상징되는 지구 생태적 위기 때문에 개발(발전) 중심의 철학과 생태적 우애와 연대의 철학이 서로 부딪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인종과 인종) 사이에 위계 서열 대신에 수평적 연대를 강조한다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그래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비유럽 문화 사이의 수직적 위계 서열이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비유럽 문화의 재구성 또는 재해석이 한창이다. 또는 성경의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라는 인식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철학에서는 땅을 곧 어머니(파차마마)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땅(자연)을 지배한다기보다 ‘존중’한다.

그러므로 먼저 오랫동안 익숙한 기존의 세계체제가 유동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세계체제의 변동과 지정학적 연구 등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기존의 서유럽(미국) 중심의 위계 서열의 근대성의 체제 안에 적응하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계체제가 얼마나 위계서열적이고 폭력적인지에 관심 없이 무조건 열심히 선진국을 따라가고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식으로 기존의 체제에 안주해 왔다. 예를 들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구조를 통한 경쟁력 확보와 이를 통한 수출 등등.

일본 아베 총리.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먼저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공격’의 원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분석할 것이지만 필자는 나름대로 어떤 생각을 간략히 드러내고 싶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현재까지 아시아 국가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럽 국가’로 두고 살아 왔다고 본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본 엘리트 그룹의 인식 전환이 일본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왔는지 모르겠다. 시기적으로 19세기 후반이 세계 자본주의의 일차 번영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반의 자본주의의 이차 번영기에 정확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체제는 흔들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이 문명/야만의 위계 서열적 이분법에 젖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나라를 ‘야만’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아주 미개하다고 차별해 왔다. 단순히 ‘혐한’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자신들을 유럽이라고 인식하고 있고 실제로 일본은 경제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핵심적 유럽의 상층부에 속해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정신 분열적 상황이 딱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아마도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유럽의 상층부에 속해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지 모른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도 이런 맥락에서 재구성하려는지 모른다.

현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서해맹산’을 말하면서 강력하게 우리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것이지 애매하다. 특히 그의 가족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드러난 문제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이다. 그런데 언술의 수준에서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모순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일부 그룹을 ‘배제’하고 위계서열을 극단화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적이라 함은 자본주의적이고 ‘능력’, ‘경쟁’, ‘발전’을 통해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 명예,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인식인데 이런 자유주의적 인식은 근대성(과학, 발전, 진보의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대성은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에 따르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성과 자본주의는 16세기 초반 유럽인들이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자원(땅), 노동력(원주민)을 거의 노예노동을 시키는 방식으로 자기들 멋대로 신으로부터 그 권력을 물려받은 것처럼 위계적으로 ‘배분’하여 세계시장에 상품(금, 은, 사탕수수 등)을 내놓기 시작한 약 5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리고 그 역사의 절정이 현재 신자유주의며, 그 신자유주의가 ‘사회’ 자체를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파시즘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의 예는 너무 많지만 고 김용균 씨의 비극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런 문제를 떼어 놓고 과거 방식의 개혁으로 우리 사회를 ‘진보’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조국 민정수석비서관. (이미지 출처 = Flickr)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인식의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구조의 맨 아래에서 많은 폭력적 차별과 억압을 견디면서도 근대적 자본주의체제에 편입하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라이프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들이 1990년대 초반부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행위자로 출현했다. 다른 하나는 그때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이 위의 비판 담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이 그럴 수 있던 것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수직적 위계 서열의 인식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학자가 아르헨티나 출신의 철학자인 엔리케 두셀이다. 그는 1965년에 “세계 역사에서의 이베로아메리카”라는 논문을 썼다. 이글은 세계사의 틀 안에서 무조건 유럽의 역사를 따라야 한다는 시각을 버리고 총체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제국주의 문화, 계몽주의 문화 그리고 대중문화의 해방”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글에서부터 두셀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해방철학’의 시각을 발표했다. 해방철학은 해방신학과 비슷하지만 철학적으로 문명/야만의 이분법을 버리고 극우적 제국주의 문화를 거부함은 물론 진보적 성향의 계몽주의 문화를 많이 따르던 자유주의 지식인의 태도를 성찰하고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까지 차별하고 무시하던 대중문화로부터 오히려 지식인들이 배우려 한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시민”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지식인 엘리트들이 부족한 대중을 계몽하여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인식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대중이 역사적, 정치적 주체로 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이미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군부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내장된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생태주의적 비전은 수직의 위계 서열이 아닌 수평의 우애와 연대의 비전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잘못된 ‘공격’을 극복하는 대안에 있어 단순히 과거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강한 국가’의 비전이 아니라 동북아와 동남아 국가들, 중동 국가들, 그 밖의 다른 어느 국가들과도 가능한 한 우애와 연대의 철학을 구체화시키는 전략을 추진해야만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행복한 사회,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현재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서 중남미의 역사와 정치, 사회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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