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해마다 7월이면, 햇볕은 뜨거워지고, 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는 축제를 지낸다. 오랜 친구들과 사는 이야기, 늙어 가는 이야기도 하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꿈과 신념을 즐겁게 듣는다. 어떤 때는 삶의 자리에서 혼돈스러워 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아픔 속에서 견디기를 배우고 있는 고요한 수도자의 팍팍한 기도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게 되면, 서점에 가서 어떤 책이 나와 있는지 구경을 하는데, 죽음에 관한 책과 도시에 관한 책들이 눈에 띈다. 왜 우리 사회는 죽음과 도시에 관심 갖게 되었을까 생각하다 글로벌화해 가는 세상은 아무래도 도시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며, 지구에서의 삶을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생각해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대교회도 역시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는 인구가 밀집한 고대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급속히 발전했다고 한다. 도시에서의 삶,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무엇보다 절실했을 공동체, 특히 빵을 나누는 공동체는 그리스도교가 퍼져 나가는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꿈꾸셨던 공동체가 오늘 우리 가운데 재현된다면 어떤 공동체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많은 사람은 요즘 공동체를 산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활동의 범위가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정보를 소유하며, 지식을 소유하는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고민하며,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적 지향이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 건지 답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공동체를 향한 꿈은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하는 것처럼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할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내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반론을 제기하거나 얼굴을 붉히면서 비판하고 화해하는 그런 공동체는 드물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통로가 없으면 마치 물이 빠져나가듯이, 구성원들은 하나둘 조용히 떠나간다. 그래서 서로 동의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여전히 공동체를 이룩한다. 사이버 공간의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가기도 하고, 전혀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을 만나서 유쾌한 대화를 하고, 또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반가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똑똑한 컴퓨터는 알고리듬이란 작동 시스템을 통해 내가 누구라고 규정해 준다. 그래서 나는 복음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 규정된 틀을 넘어, 여러 정보와 관계의 그물망을 통해 깊이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 같다.

도시 속 거리의 그림. 서울 옥인동 골목길 계단에 있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그림. ⓒ박정은

신앙인으로서 도시에서의 삶은 어떤 것일까? 도시의 신앙 하면, 나는 아우구스티노의 "하느님의 도시" 그리고,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가 떠오르는데, 이 두 분은 모두 자기의 시대 안에서 도시를 신앙적으로 읽어 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면서 문득  나도 내가 사는 글로벌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경험한 이탈리아의 에지디오 공동체는 세속 도시 영성을 가르쳐 주는 공간이었는데, 어느 평일 저녁 수많은 신자가 성무일도를 바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도시에서의 신앙과 공동체는 두고두고 숙고해야 할 숙제인 듯하다.  

무엇보다 현대를 사는 오늘의 도시 공동체는, 특히 온갖 종류의 다양함- 인종, 문화, 언어, 그리고 세대에 대해 열려 있으며 서로 다름에 대해 편안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으로 우리가 겪는 공통적 아픔과 외로움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잘 계획된 도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집들이 있는 골목길이나 대형 마트 옆에 있는 재래시장을 사랑한다. 거기 가면, 훅 하고 나는 사람 냄새, 그리고 운 좋은 날은, 좋은 시간에는 흙냄새도 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앞에 엉성한 문구점, 골목길에 쓰인 낙서, 계단에 그린 만화 같은 그림들, 그런 것들에서 나는 도시만이 가지는 영성적 느낌을 만나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그런 조금은 엉성하고, 촌스러운, 그리고 자연스런 공간에서 복음적 느낌, 가톨릭적인 마음이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또 동네 커피숍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웃음 속에서 21세기 공동체는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여름 만남을 통해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사람들 중 한 분은 여성 난민들과 공동체를 꾸린 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가 만들었다며 건네준 예쁜 책 “어린이 세계시민 수업서-난민 편”을 읽으면서, 눈을 반짝이며, “제게는 제가 하는 이 일이 교회에요”라고 하던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계속 마음에 얼얼한 감동으로 남는다.

시인 이육사는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라고 노래했다. 그가 바라는 손님은 우리의 해방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오늘 이 도시 공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고달픈 몸으로 나를 찾아오는 그 손님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내 눈에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열심히 이 도시에서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 혹은 낯선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방인들일까? 의미를 길어 내기 힘든 일상을 묵묵히 견디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어느 익명의 신앙인일까? 도시 골목골목에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흔적을 남기는 낙서꾼들일까? 시인처럼, 내 손을 흠뻑 적셔 씻어 내올 청포도도, 모시 수건도, 또 은쟁반도 없지만, 그저 그분들이 땀을 훔칠 예쁜 손수건을 한 장씩 선물하고 싶다.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린다는 7월이니까.

'청포도',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그리는 박현주 씨의 작품. (이미지 제공 =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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