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학기를 마치고 고즈넉한 주말 저녁에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조촐한 기도모임을 가졌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 드는 바람이 마음을 싱그럽게 해 주는데, 벌써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도 많아서, 적은 수의 친구들이 모였다. 재학생 두 명과, 수련수녀, 그리고 나와 가까운 베스 수녀, 이렇게 다섯 명이 둘러앉아 요한 복음 21장 15-19절 말씀을 함께 묵상했다. 혼자 기도할 때와는 다르게, 함께 앉아서 같은 말씀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갑자기 행복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내게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 울렁울렁거리며, 내 맘의 깊은 곳을 툭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복음을 읽어 주며,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예수와 그 질문에 답하는 베드로를 느껴 보자고 초대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예수님이 되어 보아도 좋겠고, 베드로가 되어 보아도 좋을 것이고, 또 그저 그 장면을 지나가는 바람이 되어도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나도 눈을 감았다.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숯불에 생선을 구워 주시며, 와서 아침을 들라고 하신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특별히 베드로-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였기로, 끝까지 주님과 함께할 것을 자신하였으나,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해야 했던, 그래서 참으로 슬펐던-에게 세 번이나 다시 사랑을 묻는 유명한 장면이다.

우리말 성서로 읽으면 예수님이 계속 반복해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지만, 그리스어로 보면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다른 표현을 쓰신다. 처음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묻을 때, 사실 “아가페” 하는가를 물으신다. 아가페는 자기를 내어 놓은 그런 헌신적인 사랑이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아가페 한다고는 대답을 못하고, 형제적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 한다고 대답한다. 두 번째에 예수님은 또 “아가페” 하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여전히 형제적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마지막 질문에서는 베드로가 응답한 그 단어를 쓰시면서 “네가 나를 형제적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주님을 "형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신다.

갈리래아 호숫가 수도원 옆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그림. 홀로 배를 젓는 베드로의 인간적 외로움과 주님과의 우정을 지키는 의지가 느껴져서 많이 좋아했다. ⓒ박정은

이 구절을 보면서 드는 질문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하길 원하시는 걸까인데, 아마도 그건 아닐 것 같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가페적이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데 아가페적이기는 아마 불가능하지 싶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한 복음서는 친구로서의 우정을 강조하고 있다.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만나서, 그분과 이야기 나누고, 또 그분을 알아 가던, 그분과 함께여서 두렵지 않았던, 그 시절의 꿈들과, 함께 맺었던 우정을 돌아보게 하시면서, “너는 나와의  우정이 아직도 설레고, 따스하며, 또 그래서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을거냐”고 그분께서 묻고 계신 것 같다.  

사실 살면서 나는 이 말씀을 참 많이 묵상했었다. 청년 시절에는 달콤하게, 낭만적으로 나를 사랑하냐는 그분의 질문을 묵상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평생을 따르고 싶은 그분께서 나에게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질문은, 나를 먼저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분의 맘을 담보로 건네는 질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듣기만 해도 맘이 설레는 구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이 구절을 묵상하려면, 늘 사랑하냐는 이 질문만 크게 들어왔었다.

그리고 마흔을 맞던 해, 처음으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가 내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떤 영성 학자는 이 구절을 제2의 부르심으로 해석하는데, 인생의 가을에, 나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소명으로, 이 소명은 수동성을 요구하고, 어두움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성령께서 내가 원하는, 혹은 익숙한 어떤 삶의 자리로부터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갈 것이라는 그 말씀이 무척 두려웠고, 또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한국 수도원에서 제명되는, 아픔을 겪었고, 삶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으며, 내가 모르던 새로운 나의 모습을 익혀 가야 했었던 것 같다. 카를 융은 자신의 아니무스와 아니마가 만나는 때라고 표현했고, 자신의 내면 안에 눌려 있던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 올라오는 때라고도 이야기했다. 또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밤을 이야기하면서, 능동적 기도와 삶의 태도가 수동성으로 옮겨 갈 때,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 속으로 나아간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이 복음을 묵상할 때는 늘 이 “늙어서는”으로 시작하는 구절에 많이 머물렀다. 이제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 그다지 설레는 것 같지도 않아서.

갈릴래아 호수. ⓒ박정은

그런데 오늘 저녁, 우연히 다시 나를 사랑하느냐는 그 말씀에 머무르게 되었다. 물론 나는 주님께서 내게 당신을 아가페 하느냐고는 묻지 않으시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분은 조용히 나를 친구로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그런데, 기도 중 상상 속의 그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그저 주님은 내가 젊은 시절에 사랑에 빠졌던 젊은 예수님이신 줄 알았는데, 그분은 젊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시긴 하시는데, 그분도 나처럼 늙어 가시는 주님이셨다. 처음으로 늙은, 그리고 아름다운 어떤 존재를 관상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언제였던가, 20여년 전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던 한 조각가 수녀님이 적어 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하늘이 푸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나무가 있습니다.… 언젠가 가지가 찢어지는 아픔이 오더라도, 그때마다 예수님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세요.”

내 영혼도 찢어지는 아픔도 겪었고, 또 꽃을 피우는 고독도 만났지만, 또 언제부턴가 나이를 먹고, 사랑한다는 말이 싱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기도모임이 끝나고 그들이 떠난 뒤, 홀로 남아 깨어 있는 이 시간, 오늘만큼은 “네 아직도예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미션은 주어진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미션이 있다면, 혹은 미션 없음의 미션일 수도 있겠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또 어디가 되든지 떠날 수 있는 혹은 아무 곳으로도 떠날 수 없는, 그런 깊은 자유를 생각한다. 낯선 것을 향해 떠나는 혹은 머무는 마음은 결국 때를 아는 지혜이며, 자신을 비우는 용기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떠나야 할 때를 식별하고, 그 시간이 오면 가볍게 훌훌 떠나는 지혜.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새롭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 그리고 나보다 나은 다음 세대에게 내 자리를 내어 주고, 축복해 주며 떠날 수 있는, 그래서 “아직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열심히 배우고 싶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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