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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수태고지”[강신숙 수녀] 12월 23일(대림 제4주일) 미카 5,1-4ㄱ; 히브10,5-10; 루카1,39-45

성탄이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경기가 바닥을 친다고 엄포를 놓아도 상점마다 약간의 성탄 분위기는 띠우며 산다. 중심가를 걸으면 경기 따윈 다 잊게 된다. 60-70년대 오랜 축음기에서나 듣던 해묵은 캐롤이 어김없이 틀어지는 걸 보면 반백의 구부정한 노인들도 이런 날은 어깨를 좀 펴고 젊은이가 되어봄 직하다. 그런 향수는 손때 묻은 레코드판처럼 틀어도 틀어도 기분 좋은 법이다. 성탄은 그런 마법을 지녔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를 ‘동화’ 같은 세계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아, 비록 그것이 아주 찰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동화의 세계가 펼치는 전조에 마리아가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유대 산골로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앳된 마리아도 나이가 든 엘리사벳도 두 여인 모두 태중에 아기를 품고 있다. 다가올 성탄을 축하하는 소리는 이미 두 여인의 만남에서 처음 울려 퍼졌다. 마리아의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의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큰 소리로 마리아의 임신을 축복하고 기뻐하면서”(1,42)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를 축하한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성탄과 관련된 루카의 통찰은 오랜 동안 교회의 신비가와 영성가들이 간직하고 놀라워했던 마리아의 경이로운 응답(Fiat)에서 시작된다. 성탄의 놀라운 신비, 하늘이 열리고 높으신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시게 만든 그 결정적 순간, 신의 한 수는 ‘마리아의 응답’에 있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은 가브리엘이 동정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의 잉태’를 알리던 그때, 그 시기에 이루어졌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간결한 어조로 전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리는 “수태고지”는 중세와 르네상스에 들어와서 가장 찬란하게 꽃피웠다. 신학과 영성은 물론 미술, 조각, 음악, 건축이 다 동원되어 이 결정적이고 가슴 벅찬 순간을 찬미하고 축하하였다.

그러다가 그 기쁨의 절정에서 그만 ‘길’을 잃었다. 화려한 예술과 신학의 정점에서 “수태고지”의 이전과 뒤가 사라졌다. 하느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지에 관해 더는 묻는 사람이 없어졌다. 사람이 되신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더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수강생은 지워지고 그 자리에 화려한 예술이, 들뜬 축하연이, 관념적 신학이, 조악한 상술들이 자리 잡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그렇게 해서 ‘미학적(?)’ 기쁨이라도 느끼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성탄에 대한 애착이 교회보다는 대형 백화점이나 마트, 도심으로 옮겨 간 것 같다. 아무튼 확실한 건,(그렇다고 흥을 깨자는 건 아니다. 축하는 마땅하다!) 이 모든 부산한 움직임이 예수성탄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사실이다. 

예수강생. (이미지 출처 = Pixabay)

히브리서 저자는 마리아의 “응답”이 이미 “메시아 자신의 응답”이었음을 알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히브 10,5)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10,9) 여기서 “당신의 뜻”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장악하던 낡은 계약(율법)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계약(법)으로 새로운 세계의 통치를 열라는 명령이다.(10,8-9) 메시아는 이 명령을 ‘수락’하였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하느님의 뜻인 양 기만하고 악용하던 세계질서를 폐지하고, 하느님 친히 제단에 제물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율법을 기만하던 자들에게 이런 하느님의 선언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메시아가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의 ‘Fiat’을 수락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의 낡은 패러다임, 곧 “두 번째 것을 세우기 위해 첫 번째 것을 치우는”(히브 10,9)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낡은 세계에서 권력을 계승하고, 거룩한(?) 돈벌이에 승승장구하던 자들에게는, 전체 사회가 이런 득실관계로 얽히고섥켜 있는 공동체에서는, 서로 윈윈하며 안정을 도모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이라 하더라도, 그런 신은 이 땅으로 내려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파괴하려 드는 자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낡은 세계는 메시아의 탄생예고로 한순간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고, 예수가 태어난 직후 권력의 광기는 극에 달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으며”(마태 3,16) 피바람이 유대 땅을 휘몰아쳤다. 교회도 예수성탄 주간에 이 모든 비극적 사건을 배치하였다. 성탄 다음 날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기념하며, 이후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이 뒤따른다. 이렇듯 예수 성탄의 배경에는 기쁨과 공포, 짙은 어둠과 새벽의 여명이 교차하는 극도의 긴장감이 깔려 있다.

우리는 예수가 몰고 온 “하느님나라”의 실제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위대한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이 체험했을 법한 이 득도의 세계는 나 같은 평범한 개인에게는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다. 물론 하루에도 수천 번 상상은 오간다. 그래도 가고자 한다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상이 실제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그 길은 예수와 마리아가 수락한 길,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하느님나라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그 길을 만들어 가면서 체득할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도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고, 기도 말미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말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 원의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이 ‘뜻’에 따라, 예수처럼 ‘우리 몸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히브 10,10) 거룩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내 오랜 습관의 산물인 ‘번제물’로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완전히 갈아엎는 ‘새 길’로서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되었다. 그 자신 스스로 자신을 내던져 “평화”가 되었다.(미카 5,4) 새해, 2019년 대한민국을 여는 진정한 평화의 길에 ‘나’ 대신 ‘남’을 쳐다보는 일은 다시 없길 결심(!)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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