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아닌 제주, 하나하나가 다 아팠다”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의정부교구 신자들이 ‘제주4.3’에 대해 알아보고 기억하며 희생자를 추모하는 순례길을 다녀왔다.

제주4.3 순례는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제주4.3 70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정평위원장 상지종 신부와 서근수 신부를 비롯한 40명이 4.3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며 4.3의 배경, 흐름, 의미 등을 알아보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진정한 평화를 지향하는 미사를 매일 봉헌했다.

첫날 순례지인 ‘4.3평화공원’에서는 제주4.3의 역사를 알아보고 희생자의 위패 1만 4000여 기가 안치된 위패봉안소에서 희생자를 추념했다.

순례 3일 동안 해설을 맡은 ‘제주다크투어’ 강은주 공동대표는 “지금도 연세 많으신 분들은 (4.3을) ‘시국’이라고 표현하신다”면서 제주 사람들은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도 규정지을 언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순례단에게 ‘칭원'(稱冤)이란 말의 뜻을 아는지 물으면서 “칭원도 두루 칭원해야 칭원이다”는 말이 있다며 “칭원은 한자어로 원통함이란 뜻으로 원통함도 웬만해야 원통한 것인데 너무 기가 막히니까 눈물도 안 나오는” 게 제주 사람들의 4.3이라고 소개했다.

여러 참가자들은 4.3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는데 4.3평화공원을 둘러보며 4.3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첫날 미사에서 상지종 신부는 “(순례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참으로 무자비했던 참혹하고 비참했던 역사를 묵상하며, 이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자비한 고통의 역사가 아니라 참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총탄에 턱을 잃고 평생을 무명천을 감고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집. ⓒ김수나 기자

둘째 날에는 4.3 때 집 앞에서 날아오는 총에 맞아 턱을 잃은 뒤 늘 무명천을 턱에 두르고 있어 ‘무명천 할머니’라 불리는 한림읍 월령리의 진아영 할머니 집을 찾았다. 이 집은 진아영 씨가 2004년 9월 눈을 감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생전에 사용하던 가재도구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턱이 없는 진 씨는 평생을 말하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후유장애를 겪으며 성 이시돌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세례를 받았고 숨진 뒤 성 이시돌 센터에 안장됐다.

진 씨 방 안에서는 생전 고향마을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 애쓰며 가슴을 치고 애통해 하는 그의 모습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순례단은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방명록에 애도하는 마음을 적기도 했다.

강은주 대표에 따르면 진아영 씨와 같은 사례가 많지만 드러내지 못한 채로 이혼을 당하고 후유장애를 안은 채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순례단은 4.3의 아픔을 간직한 또 하나의 유적지인 섯알오름으로 향했다. 서부 해안인 모슬포에 있는 섯알오름은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자리로 집단학살과 암매장이 일어났다.

강 대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에서는 예비검속으로 4.3관련자 및 지역의 지식인, 교사, 면서기 등을 무차별 잡아 가두었다.

특히 모슬포 지역에서는 370여 명을 고구마 창고와 한림 지서 등에 가둔 뒤 그들 중 191명이 8월 20일 새벽에 트럭에 실려 이곳에서 학살당했고 탄약고가 폭파된 뒤 생겨난 구덩이에 암매장됐다.

강 대표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풀려나나 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가 가는 방향을 보고 죽으러 가는 것을 예상하고 그때부터 트럭 위에서 나중에 가족들이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신발과 벨트 등을 하나씩 떨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움푹 파인 공간에 다 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시신들이 ‘멜젓(멸치젓) 담듯 잠겨져 있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뼈 개수만 맞춰서 안장을 하고, 그 이름을 백조일손지묘라고 붙였다”고 말했다.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 당한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순례단. ⓒ김수나 기자
추모비 앞 제단 위에 올려진 고무신이 당시 트럭 위에서 떨어뜨린 희생자들의 고무신을 떠올리게 한다. ⓒ김수나 기자

실제 조상은 다르지만 “우리는 백 명의 조상을 가진 한 자손이라는 마음으로 모시자”는 뜻이라 설명했다.

당시 경찰은 시신을 수습하려는 유족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켜 6년이 지난 뒤에야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1961년 군사정권 때 경찰 주도로 위령비를 깨 버렸지만 유족들이 파편을 몰래 모아 두었다가 지금 위령비 옆에 전시했다.

순례단은 묘역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 갔으나 시신조차 제때 수습되지 못한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해 묵상했다.

구리 성당에서 온 고덕금 씨(크리스티나)는 “시댁이 제주 애월인데 시아버님이 단 한 번도 4.3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이 없다"며 "여기 사람들은 4.3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순례를 하면서 많은 희생자와 아픔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미안하다는 표현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었고 내가 이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 내 삶과 일상에서 기도하며 기억하고 실천하면서 주변에 얘기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교하 성당의 한 신자는 4.3의 참상과 상처를 고발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을 읽으며 사람이 얼마만큼 악랄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며 고통스러웠다면서 “제주도를 관광도시로만 알고 있었고, 정말 좋은 바람, 바다만 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보는 눈이 달라졌고, 하나하나가 다 아프다”고 말했다.

상지종 신부는 순례 마지막 날 미사에서 “어두움 슬픔 가득한 여행에서 단지 예전에 있었던 아픔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하고 그것을 찾아나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순례단은 이 밖에도 일제 때 제주도민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군사시설인 수월봉 갱도진지, 서귀포 대정의 알뜨르 비행장,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돼 버린 금악마을, 집단학살 뒤 매장돼 유해가 발굴된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자리) 등을 순례했다.

금악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순례단은 4.3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김수나 기자

마지막 날에는 금악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4.3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제주4.3은 1947년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3만여 명이 모여 3.1절 기념집회를 하던 중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채이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경찰이 발포해 열다섯 살 학생을 포함해 6명이 죽은 데 항거하는 민관총파업에서 시작됐다. 이 일로 1947년 한 해에만 2500명이 검속됐고 고문치사에 이르는 일도 발생했다. 

이듬해인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의 남로당이 무장봉기를 시작하며 군경 토벌대는 대대적 진압과 초토화작전을 벌였고 1954년까지 이어진 집단학살 등으로 확인된 희생자만 1만 4000명, 추정되는 전체 인명 피해는 2만 5000-3만 명에 이른다.

이념대립과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입에 올리지도 못했던 제주4.3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진상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그 뒤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되고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 때 정부 차원에서 처음 공식 사과했다.

현재까지도 제주4.3에 이름을 붙이는 문제에 대해 ‘사건’, ‘항쟁’, ‘민중운동’ 등 역사적 성격 규명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천주교는 201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2018년 4.3 7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그 뒤 심포지엄 등의 행사를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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