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817 추정. (이미지 출처 = 함부르크 아트센터 홈페이지)

‘아니, 아니, 이 그림 말고....’

한 달에 한 번 이 글을 쓸 때가 되면, 요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멈춰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림이 먼저 나타날 때도 있지만 보통 간발의 차이로 내용에 이어서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하려는 이야기가 있으나 뭔가 막힌 듯 그림이 떠오르지 않아 기억 속 저장소를 뒤지다가 이 작품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이거 말고!’, 치웠는데 또 떠올랐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작품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매우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에 대한 글도, 평도 많고 심지어 제가 강의하는 학교 복도에 커다랗게 액자 속 인쇄본으로 걸려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 그림을 바라볼 때 감탄이나 감동보다 불편함이 먼저였습니다. 좀 우스운 이유일 수 있습니다만, 왜 구두를 신고 저런 옷을 입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을까 하는 질문. 산을 좋아하는 저는 이 그림을 볼 때 특히 저 구둣발과 돌산의 바닥이 만나면서 생길 ‘접지’의 매우 불편한 느낌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목처럼 ‘방랑자’가 아니라 ‘정복자’처럼 산맥을 내려다보는 저 뒷모습도 말이죠.

사실 이런 우문에 대해 작가가 내놓은 현답이 있습니다. 당시 장르 중 가장 하위라고 여겨지던 풍경화(단지 자연의 모방이라 여겼기 때문에)를 인간 내면과 종교적 신심 표현의 방식으로 격상시켰던 프리드리히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 낼 수 없다면 눈 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명언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다시, 자화상에 비추어 보아 작가 내면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안개 바다를 그와 같은 자리에 서서 내려다봅니다. 그의 자화상에 비추어볼 때 이 뒷모습은 작가 본인이라는 분명한 확인 외에, 그가 당시 실제로 가 보고, 혹은 늦은 나이께 하게 된 결혼을 앞두고 표현한 그의 내적 상태다, 하는 배경 설명은 잠시 미뤄 두고요.

다른 작품들에서도 인물은 주로 뒷모습으로 표현하고 특정한 옷차림으로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한 그의 묘사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 모습은 작가가 일상 속에서 문득, 아니면 자주 느끼며 머물렀을 자신의 내적 상태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산을 오를 때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면 정상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무한정 여러 갈래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려올 때는 그 각도를 조금만 달리 잡아도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산 아래 마을 일상에서나 입을 옷을 입고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이 인물의 다음 여정은 다시 내려가는 것일 겁니다. 구름에 가려 저 아래는 하나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꼭지점에서 어디를 선택해 내려가는지가 내려가는 동안의 길과 그 도착 지점을 정합니다. 그런데 이 안개는 바다와 같고 나는 그 끝을 확신하지 못한 채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묻게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것에 따라 내려가는 방향, 산의 꼭대기에서 섬세하게 결정해야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이후 벌어지는 각도를 조정하는 그 선택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이 이 그림을 불편하게 떠오르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산 꼭대기 어울리지 않는 인물의 옷차림, 오히려 그래서 일상 속 근본적인 존재 물음이 올라올 때 느끼게 될 그 당혹감과 아무도 대신하거나 함께할 수 없고 나만이 찾아야 하는 엄중함.  

최근 교육 문제와 사회 문제들 중 몇 가지를 주의 깊게 보다가 이 근본적 질문 -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부재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비극들을 발생시킨다는 아찔함이 이 그림을 기억에서 불러냈습니다. 교육권 평등/교육의 획일화/교육 행정의 투명화를 구분하지 못한 채 일괄 공교육화하려는 유치원 교육 개혁안, 교육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빠진 채 대입 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을 요란하게 열다 제자리에 멈춘, 혹은 더 후퇴해 버린 대입 제도 및 고교교육 혁신안, 연구하고 가르치는 길에 들어서는 이들의 설 자리를 대학 예산 부족과 고용 부담의 명분으로 없애게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일명 시간강사법) 시행, 그리고 BK21(두뇌한국21플러스 사업)을 비롯한 정부 지원 예산 확보나 임용을 위한 양적 실적을 위해 교수 자신만 아니라 대학원생 제자들까지 가짜 학회와 학회지에 투고하고 참여하는 관행. 의문스러울 만큼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교육 전문가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전문가는 그 본질이 무엇이며 현재 그 본질에 비추어 우리는 무엇을 하고 나는 무엇 하고 있는 사람인지 물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즉, ‘교육이 무엇인가’, 교육의 본질을 묻고 이에 비추어 우리가 하고 있는 현실을 진단하고 그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이, 그에 있어 ‘나는, 우리는’ 무엇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 일관된 오류의 방식을 발견하다가 다시 눈에 들어온 ‘탈핵’ 공론화 과정의 몇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인류를 포함한 자연계의 생명이 걸린 ‘탈핵’의 문제에 당당하게 ‘우리 분야 밥줄이 사라지는 문제’라며 핵발전의 이론적 근거들을 생산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일부 ‘원자력 발전’ 분야의 전문가들. 실제 이들이 내세운 전문성이 큰 영향을 미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신고리 5, 6호기’ 건설은 재개되었고 정부는 오늘도 체코에 원전을 팔기 위해 ‘한국 원전의 우수성’을 홍보합니다. 염려와 부끄러움과 고통은 우리의 몫인가 봅니다. 비슷한 오류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교육 개혁안’을 내놓은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교육은 신분 이동의 사다리’라는 문구를 반복적으로 공문서에서 읽으며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것도 역시 우리의 몫이고요.

당신들과 우리를 굳이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할 때 언제든 우리는 많은 이에게 크나큰 고통을, 부끄러움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저 안개 바다 위의 질문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어야 산을 내려가 가야 할 지점에 가닿을 수 있음은 우리 각자에게 구분 없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극히 불편하고 이상스러운, 얇은 구둣발로 돌산을 밟는 저 느낌은 일상 속 물어야 할 본질을 물을 때 느껴야 할 그것일 수 있겠습니다. ‘나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부끄러워지기 전에, 나도 모르게 비극과 고통 발생의 원인이 되기 전에 물어야겠습니다. 얼른 답을 찾아 빨리 산을 내려가려고만 하지 말고, 저 불편함과 막연함을 견디면서.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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