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9월 23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103인 순교자'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한국교회는 이번 주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지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 대축일에 복음은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생명을 버림으로써 신앙의 생명을 지금까지 이어 준 순교자들의 삶과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끝을 상징하는 나무이지만 영광으로 덮여 있는 십자나무는 참 많은 의미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의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 인생의 숙명인 양 그렇게 안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사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제 십자가’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흔히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게 제 십자가인데요’ 그렇게 십자가는 나의 일부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인내하고 참는 것만이 십자가를 안고 가는 삶인 양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일까요? 분명 십자가는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흉측합니다. 죽음을 담고 있는 십자가는 바라보기에 부담스럽습니다. 피와 땀을 품고 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고통만 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역시 비극적이기만 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피와 아픔을 담고 있는 십자가는 그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그 나무에서 구원의 시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그 십자나무에서 새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광채로 번쩍이는 영광된 나무’이자 ‘한없이 고상하고 고귀한 나무’ 그리고 ‘유일한 우리 희망 십자가 나무’라고 찬미해 왔습니다.(성주간 저녁기도 찬미가 중) 그렇게 십자가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가 각자 삶에서 지고 살아가야 될 십자가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1독서에 배치된 지혜서의 말씀은 이를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 3,5)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 신앙인에게 십자가의 가장 핵심적 의미입니다.

혹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고통을 십자가라며 감내해 오진 않으셨습니까? 혼자서 감당하지 힘든 고통을 십자가라며 끊임없이 참고만 살아오진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내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고통만을 주는 일들은 주님께서 나에게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그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극복해야 될 나의 숙제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는 십자가도 그래야 합니다. 

삶의 순간순간 십자가라는 이름 아래 무기력해지지 맙시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분명 아닙니다. 거짓 십자가는 용감히 극복해 내고 나의 구원에 필요한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함께 청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십자나무에서 영원한 생명이 뿜어 나오듯, 그 십자가를 통해 목숨을 구하리라는 희망이 있듯, 내가 살아가면서 지고 갈 십자가는 나에게 있어 가장 부족하지만 나를 주님께로 이끌어 줄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은 누구보다 주님과 가장 흡사한 모습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고통의 연속만이 존재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순교입니다. 그 사건 이면에는 고통을 넘어선 영광과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자들이야말로 참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라는 2독서의 말씀대로 현실의 고통이 주님을 향한 그들의 희망과 영광의 여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려 있네’

십자가에는 구원과 희망이 녹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픔으로 시작해 영광으로 향합니다. 내 삶의 십자가도 그래야 합니다. 단순한 고통의 인내, 끊임없는 삶의 애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하시는 그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짓 십자가를 뽑아내고 주님께로 이끄는 참 십자가를 만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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