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8월 26일(연중 제21주일) 요한 6,61-70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질문에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문의 기본적 의미 (질문 - 본질을 묻다)에 가장 가깝게 부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지요. 가장 실질적인 예는 바로 이것입니다. 친구에게 소개받은 어느 식당에 가서 친구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식당에서 네가 추천하는 메뉴가 뭐니?” 여기에는 내가 가진 일정 정도의 지식이 있어도 상대방의 생각을 묻는 목적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문의 두 번째 기능은 상대방에게서 내가 의도한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말 “빨리 안 일어날래?”, 이 질문은 무언가를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빨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이 질문이 종결됩니다.

이 외에도 질문에는 또 하나의 기능이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기 위해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기능인데 바로 ‘동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원하는 답을 듣는 것, 내 말에 대한 정당성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함께 쇼핑 중인 커플이 있습니다.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묻습니다. “저기 떡볶이 맛있겠다. 먹고 갈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여자친구는 상대방이 떡볶이를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먹고 싶으니 너는 함께 해야 한다’가 그 질문에 녹아 있는 본질입니다.

제가 질문의 종류라는 주제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에는 지난 5주 동안 주일 복음에 제시되었던 요한 복음 6장 속에 녹아 있는 주님의 수많은 질문 때문입니다. 6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예수님의 첫 말씀도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여기에 “예. 예수님 저기 앞에 큰 빵집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질문의 의도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대답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바로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수 있으면 생명의 빵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 (이미지 출처 = Pixabay)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위의 범주를 통해 분류해 보자면 3번째 기능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답이 이미 있습니다. ‘가지 마라’는 뜻이지요. 당신이 생명의 빵임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근원임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고 싶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첫 장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첫 장면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시어 생명을 부여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던진 첫 말씀 역시 흥미롭게도 질문이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어디에 존재하고 있냐? - Ubi es?)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던진 질문은 이렇듯 성부 하느님의 첫 질문을 상기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인간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내 곁에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당신 곁에 머물지 않고 숲속에 숨어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인데 나를 두고 다른 데로 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에 등장한 예수님의 질문과 창세기에 등장한 성부 하느님의 첫 질문은 서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곁에 있으니 너도 내 곁에 머물러라’는 의도가 그 질문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거리 두기’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에서 거리를 두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며’ 주님을 바라 왔던 베드로의 대답이 인상 깊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요한 복음 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의지를 담아 등장한 첫 장면임에 주목해 봅니다. 그리고 그 첫 이야기 역시 질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제대로 거리 둠으로서 주님이 참 생명 자체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사 기도해 봅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이를 통해 제대로 주님 곁에 다가설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함께 청해 봅시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주님의 말씀에 질문에 대한 의도도 모른 채 ‘제가 요즘 조금 바빠서요. 생각해 보고 대답해 드릴게요’라는 어리석은 대답을 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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