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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둠에 동의하기[유상우 신부] 8월 12일(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오늘부터 격주 목요일마다 1년간 부산교구 유상우 신부의 강론 '삶으로 말씀 읽기'가 연재됩니다. 강론을 맡아 주신 유상우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를 가까이하려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고, 내가 아끼는 물건은 항상 내 눈에 보이는 자리에 그리고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두려 합니다. 그러한 사람의 본능은 그 대상이 가까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무언가일수록 더 간절해집니다. TV로만 보고 환호하던 가수나 배우를 실제로 한 번 볼 수 있으면 하는 상상,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하는 전자기기를 내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들이 그 간단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 조건이든 심적 조건이든 나에게 가까이 올 수 없는 것, 사람은 그것이 내 곁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곁에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 갑자기 나에게 오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앞의 예로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가 내 곁에 온다면 나는 너무나 긴장되어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깝게 두길 원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면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버리면 재미가 없지요. 알맞은 긴장과 거리 속에서 더욱 애타는 사랑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렇게 삶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둠’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일에 제시된 복음에서도 ‘거리 둠’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요한 6,42)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그들이 주님과 가까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자신이 보는 그 관점으로만 주님을 한정짓고 맙니다. 이미 자기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인들의 단면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내가 경험한 주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비교적 열심히 해 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거리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 약점이 숨어 있습니다. 보는 것만 계속 봐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계속 보이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자존심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뒤로 가면, 조금만 거리를 두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도 자신과 거리를 두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온 것, 이보다 더 큰 거리 차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도 모자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은 세상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먹히는 빵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거리 둠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톨릭 신앙은 주님과 너무 거리를 가까이하게끔 만듭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주님을 가까이 두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본능과 감각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먹는 행위’를 통해 주님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의 1독서와 복음도 ‘먹는 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됩니다. 엘리야가 힘을 얻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했던 것처럼, 복음의 주님께서는 그 힘의 원천으로 당신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주제인 ‘먹는 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려고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늘 제대로 된 모양새로 우리와 가까이 갈 준비를 항상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같이 완벽한 모습으로 그분과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 의지적으로 거리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시각을 버리고 내가 가진 경험을 버리고 한 발 더 물러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유대인들처럼 주님을 다 알고 있노라고 착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둘 때, 주님께서 그 무엇보다 가까운 방법으로 나에게 오실 그 시간을 기다리며 그분을 더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거리 둠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나의 소유로만 한정짓지 말고 한 발 더 물러설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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