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9월 9일(연중 제 23주일) 이사 35,4-7ㄴ, 마르 7,31-37

오늘 1독서를 이루고 있는 이사야서 35장 전체를 보면 참 내용이 밝습니다. ‘기뻐하다’(lætor)로 시작하여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 이사 35,1) ‘기쁨’(lætitia)으로 끝이 납니다.(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 이사 35,10) 이사야서 1부의 끝부분에 배치된 해당 본문은 2부의 주제를 미리 맛보도록 인도합니다. 즉 바빌론 유배를 마친 이스라엘 민족의 귀향을 예언하고 이것을 한없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민족들의 땅에서 억압받던 이들의 해방을 노래하고 이들을 억압했던 불의한 이들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쳐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정말 예언서다운 내용이 묘사되어 있지요. 

그런데 주일 1독서를 읽으면서 제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갔었을 법도 한데 유난시리한 구절에 마음이 걸렸습니다.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마음이 편하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득 하느님의 보복을 받는 그들의 입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바라보는 이들은 정의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이들 입장은 한없이 절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 삶에 대한 부족함을 깨닫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런 하느님의 정의가 다가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다소 소심한 의문이 저를 휩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 모습이 제 스스로도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이 낯선 제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한참 고민을 하다 신학생 때 읽었던 교황님의 칙서 ‘자비의 얼굴’을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한 사건들, 아니 시선을 더 좁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흔히 말을 내뱉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뭐 하시나.” 그렇게 우리는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잡아 주실 정의로운 하느님을 희망합니다.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황님의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정의만을 요구하려는 것은 정의가 필수불가결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칙서 '자비의 얼굴', 10항)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이미지 출처 = publicdomainpictures.net)

그렇다면 자비와 정의는 어울릴 수 없는 걸까요? 짧게 생각하면 자비와 정의는 대립점에 있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교황님은 자비와 정의는 대립하는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마음속으로 자비와 정의를 함께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거기에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 신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주제를 따르자면 감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에게도 하느님이 정의롭고 단호하시다면?” 내가 무언가 불의에 빠지고 죄를 지으면 흔히 자비로운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상대방에게는 정의롭고 나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원하십니까?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는 정의롭고 나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빠지기 쉬운 왜곡된 하느님 상에 대한 유혹입니다

1독서에도 감각의 회복이 제시됩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라”(이사 35,5) 감각이 회복된다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체험한 주님이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에게 주님은 자비와 정의가 함께 공존하는 분이실 것입니다. 우리도 자비와 정의를 함께 체험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닫혀 있고 내 시선이 어두웠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감각도 바로잡아 주시고 눈과 입을 열어 주십사 청해야겠습니다.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믿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만도 아니고 정의로우신 분만도 아닐 것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오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합니다.”('자비의 얼굴', 21항)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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