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제주에 예멘 난민 500여 명이 들어오고, 설상가상 법무부가 이들의 출도를 제한해 발이 묶이면서 한국 사회는 난민 문제를 새롭게 겪고 있다.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논쟁, 청와대 청원 등 혼란이 이어졌지만 중앙 정부는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근시안적 결정을 내렸고,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처음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곧 ‘중앙정부의 몫’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그러는 동안 난민이 거쳐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난민에 대한 아무런 시스템이 없던 제주에서 예멘 난민들은 일자리와 숙소, 자금난을 겪고 있다. 그나마 제주지역 종교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뜻있는 개인들이 나서 예멘 난민을 돕고 있고 천주교 제주교구도 이주사목센터를 중심으로 구체적 난민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7월 1일 교황주일 사목서한을 통해 “우리를 찾아온 난민을 문전박대하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무슨 자격으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고 복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편협한 이기적 자세로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남북의 평화와 화합을 만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며,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외면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거부하는 범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난민 수용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밝혔다.

7월 19일, 제주교구청에서 만난 강우일 주교는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는 어렵거나 두렵다고 해서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징표이며, 난민을 환대하고 돌보는 것은 보편교회 전체가 가야 할 방향임을 다시 확인했다.

또 “난민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출도 제한 해제가 시급하다. 난민협약에 가입해 놓고 입국을 막거나 출도를 막는 것은 정부의 자가당착”이라고 지적하고, 출도 제한 조치를 해제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제주도청이 1차적 책임을 갖고 난민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우일 주교와 나눈 문답 전문이다.

 

강우일 주교는 "난민은 어렵다고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징표"라고 강조했다. ⓒ정현진 기자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해 제주교구 차원에서 입장을 냈다. 이런 입장과 실천이 한국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뤄져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비전을 넓혀 가야 한다고 보는가?

강우일 주교 : 난민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과 행동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주교단의 입장도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제주에 예멘 난민이 집중적으로 들어와서 언론에 크게 부각이 됐고, 정부가 출도 제한 조치를 내려 심각해진 것이다. 사실 한국은 이미 몇 년 전에 천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다만 육지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슈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난민이 발생하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이제 시대적 흐름이고, 우리가 어렵거나 두렵다고 해서 거부하고 외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보편교회 전체가 가야 할 방향이다. 제주교구가 신자들과 함께 난민들을 돕고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다.

현재 이주사목센터를 중심으로 각 본당도 참여해 다양한 방식으로 난민 지원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외에 제주교구가 계획하는 지원 대책은 무엇인가?

강우일 주교 : 우선 이주사목센터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일들을 하고 있으니, 교구는 다른 방식을 통해 지원을 하려고 한다. 중앙정부와 제주도에 난민 관련 위기관리를 하도록 요청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난민에 대한 의식 개혁이고, 그것부터 해 나가기 위해 현재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의식도 심화시켜야 하지만 풀뿌리 단계로 확산시켜야 하기 때문에, 각 본당 구역장, 반장 교육을 하려고 한다. 난민 문제가 우리의 신앙, 복음과 어떻게 직접 연결되는 것인지 함께 깨우쳐야 한다.

또 각 성당에 지원요청 공문을 보냈는데, 이를 통해서 성당과 신자들이 다양하게 후원을 하고 있다. 난민이 묵을 집이나 공간을 제공하거나 공소와 성당을 제공하고 또 이들이 필요한 여러 물자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교구에서 별도의 기구를 만들 생각을 했지만, 이주사목센터를 중심으로 지구별로 협력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기로 했다.

그런데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집단 수용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한 가정이 한 가정을, 그리고 한 가정이 한 사람을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분위기가 사람이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는 데 엄청난 힘을 갖는다. 난민도 보다 안정되고 받아들이는 쪽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 이웃이라는 체험을 하고 또 그 체험을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러면서 서로가 배울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고 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교회가 난민을 맞이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적 영성이 있을 것이다. 강정해군기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신앙과 영성 안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강우일 주교 :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스스로 끊임없이 가장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셨다. 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29-30)고 하셨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때로는 온유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등으로 바꿔 부르셨다. 결국 예수님의 근본적 영성이랄까, 혼은 가난한 사람들(아나빔)과 함께하는 것이고, 스스로 아나빔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세상에 온 분이다. 교회는 그런 영성을 어느 시대에서든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강정해군기지 싸움을 시작한 것도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와 군대가 가장 작은 어촌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작은 이들 편에 함께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판단이었고, 예멘 난민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난민 옆에 교회가 서지 않으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없다. 우리로서는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해야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사는 것이다.

특히 예멘 난민에 대한 두려움은 이슬람 포비아(공포증)와 관련이 있다.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인데, 직접 만났던 어느 난민이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이라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간극을 없애기 위해서 이슬람과의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강우일 주교 : 맞다. 우리가 너무 모른다. 이슬람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슬람이라면 한국인에게는 곧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있다.

이슬람 국가에 살거나 이슬람교도들을 만난 다양한 경험이 있을 텐데, 부정적인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았던 수도자나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일반적인 무슬림들의 삶의 결은 예전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시절의 우리네 문화와 비슷하다고 한다. 물론 권위주의, 가부장적이 강한 면이 있지만 서로 아끼고, 밖에서 온 이들에게 관대하고, 그런 따뜻함이 어떤 면에서는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안에서 살아본 이들의 증언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이들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이야기를 일반화하고 모든 이슬람에 적용해서 볼 수밖에 없다. 이슬람 인구가 전 세계 30퍼센트에 가깝다. 그런 그들을 우리가 외계인 취급을 하면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좀 더 넓혀야 한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한국 역사적으로 6.25전쟁 때 경남과 대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민들이 난민이 됐다. 그러나 맨몸으로 피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당시는 누구나 가난했고, 그래서 갑자기 맨몸으로 거리로 나온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백 배 더 풍요로워진 한국 사회는 그 연민을 잃어버렸다.

또 제주4.3 당시에도 제주에서 일본으로 피난한 이들이 1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을 내치지 않은 일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신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처음부터 난민, 나그네의 하느님이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두 난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핵심적으로 하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떠도는 우리를 지키고 거둬 준 분이라는 체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뒤에 형성된 율법은, “고아와 과부, 이방인, 나그네를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에서 이방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난민으로 종살이 하고 있는 백성들의 고함과 신음을 듣고 강한 팔을 뻗어 구해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예수님의 공생활, 강생의 신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나빔(가난한 자)의 하나였고 아나빔과 함께하기 위해서 세상에 온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그저 하늘에 계신 추상적인 무색무취의 하느님을 입으로 섬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하늘꼭대기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가장 힘들어하는 이들 가운데 찾아오시고 동반하려는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런 자리에 있는 하느님과 발걸음을 함께 옮겨야 한다. 그런 우리의 신앙의 내면을 좀 더 내실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앙에 있어 큰 도전의 시기다.

나는 기후, 전쟁, 경제적 양극화 등의 이유로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은 결국 하느님이 양극화를 멈추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지구촌으로 사는 한 단계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누구나 이 짐을 나눠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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