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61]

나는 농사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적극 일에 뛰어들 형편이 아니다 보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신랑한테 믿고 맡기는 게 속이 편하다. 하지만 내가 굉장히 절박함을 가지고 달려드는 농작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구마! 시골에 살면 고구마가 지겹고 시시하지 않냐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 내 경우엔 시골에 살면서 비로소 고구마의 참맛과 가치를 알게 되었다.

왜냐, 고구마를 심고 싶어도 심지 못하던 시절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합천에 살 때는 멧돼지 때문에 고구마를 심을 수가 없었다. (멧돼지가 고구마를 엄청 좋아한다. 고구마 심은 걸 알면 밭을 다 헤집어 놓는다.) 그러니 농사짓는 집에서는 흔하게 먹는 겨울 간식 고구마가 나에겐 별나라 특식이라도 되는 양 여겨졌다.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식탁에 놓인 고구마를 보고 먹고 싶다 말도 못하고 몰래 군침을 삼킨 기억도 있다.) 까짓 거 사 먹어도 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농사짓고 살면서 농산물을 사 먹는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10킬로 한 상자 사 봐야 며칠 먹지도 못하니 원껏 먹으려면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다행히 이곳 화순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는 집 앞 텃밭이 꽤 넓은 편이라 고구마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고구마 심을 무렵이면 신랑이 굉장히 바쁘다는 것. 모내기 끝내자마자 곧장 논에 풀 매러 다니고, 밀 보리 수확하고, 틈틈이 이 콩 저 콩 심고.... 논으로 밭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그러다 보니 고구마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아무리 바빠도 고구마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고구마부터 심었겠지만 나와 달리 신랑은 고구마를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어도 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신랑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농산물은 곡식, 그 가운데서도 콩이 최고다. 서리태, 쥐눈이콩, 납작쥐눈이콩, 선비잡이콩, 밤콩, 푸른콩, 피마자콩, 메주콩, 금두, 아가콩.... 아무리 바빠도 콩은 이렇게 가지가지 정성 들여 심는다.)

해서 자연스럽게 고구마를 더 좋아하는 사람인 내가 고구마 농사를 챙기게 되었다. 신랑 옆구리 찔러서 두둑까지만 만들어 놓게 하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한다. 씨고구마 묻어서 모종을 기르는 것부터 부족한 모종 얻어 오는 것, 순 잘라서 심고, 풀 관리하는 것까지....(물론 완벽하게 내가 다 할 수는 없다. 애들 데리고 있다 보면 변수가 오죽 많은가. 내가 하다가 팽개쳐 두고 있으면 신랑이 뒤처리를 하고 캐는 것도 다 알아서 한다. 그러고 보니 결국 내가 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우뚝 선 고구마 모종, 살아 주어서 고맙다! ⓒ정청라

아무튼 올해도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비를 기다리며 고구마 모종 심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비가 올 때 심어야 (물을 안 주고 심어도 되니) 힘도 덜 들고, 뿌리 내림이 잘 되어 모종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 소식은 없고, 비가 약간 온 뒤에 심은 모종은 살아남은 게 몇 개 안 되고, 고구마부터 심어 놓아야 다른 일이 손에 잡힐 것 같고, 그래서 물을 줘 가며 몇 줄 심기도 했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지나가며 한마디 하셨다.

"참 이상허네. 볕이 똘각똘각한 날 고구마를 심게....(쯧쯧!)"

그 말 듣고 '날마다 물 줘서 모종을 보란 듯이 살려야지!' 했는데 물 몇 번 주다 말았더니 보란 듯이 모종이 죽고 말았다. 그제서야 그동안 누누이 들어왔던 동네 할머니들 말씀이 귓가에 크게 들어왔다.

"고구마는 비올 때 비 맞.으.면.서. 심어야 잘 살어."

지난번에 비가 얼마 안 왔어도 비 맞으면서 심은 앞집 할머니 모종은 보란 듯이 쌩쌩하지 않은가! 나도 다음엔 꼭 비를 맞으면서 심으리라.

그러다가 마침내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비는 내리는데 내리다 말다 하는 통에 얼마나 내릴지 땅이 젖을 만큼은 내릴지 알 수가 없었다. 비가 많이 올 줄 알고 모종을 심었다가 비가 얼마 안 오고 그쳐 버리면 괜히 아까운 모종만 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도 비 맞으면서 심어야 잘 산다고 했으니 얼른 나가 심어야 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고민만 잔뜩 하고 있었는데 늦은 오후가 되자 빗소리가 제법 굵어진 듯했다. 그래, 서둘러 저녁 준비를 해 두고 고구마 모종을 심자! 이건 분명 고구마 비다. 고구마 비가 내린다!

"다울아, 수제비 끓여 놨으니까 배고프면 밥상 차려서 동생들이랑 챙겨 먹어. 엄마 고구마 심고 올 테니까."

"지금? 비오는데?"

"겨우내 고구마 먹고 살려면 비를 맞으면서 심는 수밖에 없어. 너도 고구마 실컷 먹고 싶으면 동생들 잘 보고 있어라. 알았지?"

다울이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비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신랑이 고구마 심을 두둑을 다섯 개나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서 애들하고 저녁 먹어요. 고구마는 내가 심을게."

"같이 해요. 얼른 심어 놓고 가서 먹죠 뭐."

기대도 안 했는데 신랑이 함께 한다고 하니 나는 더 신이 났다. 평소와는 달리 날랜 속도로 고구마 모종을 심었다. 세찬 비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날이 어둑어둑해지도록 힘든 줄도 모르고... 그런 내가 참 신기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꽤 오랜 세월, 악착같은 데가 없어서 걱정을 듣고 살아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악착같이 일을 하고 있다니, 대체 고구마가 뭐길래!

그날 밤, 자려고 눈을 감자 고구마 모종을 심는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빗소리는 더욱 굵어져서 지붕을 시끄럽게 때리는데 나는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마침내 할 일을 다 마친 이의 뿌듯함이란!

'고구마 비야, 고마워! 네 덕분에 고구마 모종 살겠다. 만세 만세 만만세!'

날마다 우당탕탕 사건 사고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아이들 덕에 악착같이 먹고 사는 맛을 배우고 있다. 사진은 바깥 부엌에서 피자 구워 먹기 놀이를 하며 한 컷. 언젠가 고구마 구워 먹을 날을 기다리며.... ⓒ정청라

덧.

다음 날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보니 전날 심은 고구마 모종들이 벌떡 일어난 채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종이 모자라서 덜 심은 두둑 한 개가 자꾸 눈에 밟히는 게 아닌가. 얼른 이웃집 할머니네 밭으로 달려가 고구마 순을 얻어 왔다. 다랑이와 다나 챙기는 건 다울이에게 맡기고 또 정신없이 모종을 심었다.

그때, 바깥 부엌 쪽에서 다나 울음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 다나가 파리 잡는 끈끈이에 달라붙었어!"

"뭐, 뭐, 뭐라고?"

할 수 없이 호미를 내던지고 다나한테로 달려갔다. 덜 심은 데는 장맛비 올 때 비 맞으면서 심어야 할까 보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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