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63]

날이 더워지면 아무래도 무슨 일이든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난주에 3박4일 동안 큰 손님을 치르고 났더니 그 뒤로 긴장이 확 풀리면서 평소처럼 뭔가 해 먹고 싶다는 의욕도 솟구치질 않고 적당히 때우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만약 집 가까이 밥 사 먹을 데가 있다면 너무나 쉽게 외식을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만 해도 호박된장국에 열무김치 있으니까 감자알조림이나 하나 더 할 요량으로 작은 감자알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앞집 할머니가 놀러 오셔서 "이 집은 뭐 해 먹고 살어?" 하면서 한참이나 반찬 없어서 밥 못 먹겠다는 얘길 하셨다.

"아주머니 집에는 맛있는 묵은 김치도 있잖아요. 볶아 먹으면 맛날 텐데...."

"에그, 안 맛나. 셔서 못 묵어."

"밭에 애호박이 주렁주렁 하더만요. 저도 아까 낮에 아주머니가 주신 애호박 썰어 넣고 된장국 끓였어요. 그랬더니 된장국이 훨씬 맛있던데요."

"맨 처음에만 먹을 만하제 안 맛나. 호박국 낋여 놔도 누가 손도 안 대."

"닭이 달걀 낳을 때 되지 않았어요?"

"인자 하루에 일곱 개씩 낳는디.... 잘 안 묵어져."

"그럼 장에 가서 맛난 것 좀 사다 먹으세요. 입맛 없다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요."

"장에 가도 뭐 살 것이 없당께. 맛난 것 좀 있으면 쓰겄는디 암것도 없어."

앞집 할머니 얘길 자세히 들어 보니 결국 반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입맛이 없는 것이었다. 입맛이 없으니까 괜히 반찬 타령.... 한데 그 앞에서 다나는 생 애호박을 손에 쥐고 맛있게 베어 먹으며 "입맛 없는 게 뭐에요?" 하는 표정으로 할머니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애호박을 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얘길 듣고 나도 몇 번인가 샐러드에 넣어 먹어 본 적은 있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던데 다나는 참 대단한 입맛을 가지고 있다.) 그뿐인가. 다랑이는 당근을, 다울이는 가지를 들고 우적우적 베어 먹고 있었다. 한여름 더위에도 지치지 않는 입맛, 날것 그대로 맛있게 받아들이는 천진한 식성, 아이고 너희는 좋겠다.

나는 마냥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앞집 할머니가 다울이를 붙잡더니 그만 먹으라고 손사래를 쳤다.

"왜 그러세요?"

"까지는 생으로 먹으믄 입 아퍼. 입 아픈께 먹지 마. 큰일 나!"

그 말을 듣고 당장 가지를 뱉어 낸 다울이, 먹던 가지를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치!

"엄마, 나 그럼 이 가지로 요리해 봐도 돼? 내가 꿈에서 다람쥐를 만났는데 다람쥐가 가지로 부침개 만들어 먹자고 했어. 그래서 같이 만들어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거든. 오늘은 내가 가지 부침개 해 줄게."

"그래, 그럼. 대신에 요리 마치고 나면 요리 일기 쓰는 거다."

한편으로 귀찮고 성가신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얼마 전부터 다울이가 부쩍 요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럴 때 자꾸 해 보게 해야 부엌과 친하게 지내지 않겠나. 나는 작심하고 다울이를 부엌데기 견습생으로 키우기로 했다. 최대한 마음을 열고 '참을 인' 자를 새기고 또 새기면서.... 자,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좀 볼까?

다울이를 채소공예가로 불러야 할까 보다. 샐러드 만든다더니 온갖 채소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정청라

일단 다울이는 가지를 동그랗게 썰었다. 동그랗게 썰어서 부치려는 거구나 했는데 웬걸. 동그란 가지 하나하나에 무늬를 새겨 넣는 게 아닌가. 격자 무늬, 빗살 무늬, 네모 속의 세모, 심지어 여기저기 도려 내어 고양이 모양까지... 참 가지가지 디자인이 탄생한다. (나로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해 봐야겠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작업 과정이다. 일류 호텔 요리사나 시도할 법한...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나와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작품 하나 나올 때마다 다랑이와 다나는 마치 놀라운 마술쇼라도 보는 듯이 환호성을 터뜨리고 동생들의 반응에 한껏 고무된 다울이는 자투리 가지를 던져 주며 큰 은혜를 베푸는 듯한 몸짓이었다.

"야옹이는 누가 먹을래?"(다울)

"나!"(다랑)

"나보!(나도)"(다나)

"그래? 그럼 야옹이 하나 더 만들어야겠군. 근데 잘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알았지?"(다울)

"응!"(다랑, 다나 동시에)

그렇게 해서 꽤 긴 기다림 끝에 가지 디자인 과정이 끝나고 그 다음 과정부터는 내 지휘 아래 반죽 옷을 입히고 기름 두른 팬에 전을 부치는 작업이 이어졌다. 가스레인지 높이가 다울이 키에 안 맞으니까 의자 하나 갖다 놓고 부치는데, 다랑이 다나까지 그 의자에 올라가서 지켜보고 서 있으니 북새통이 따로 없다. 더군다나 가스불 앞에 애들 셋이 서 있으니 어찌나 불안불안한지 나는 연신 주의를 주며 잔소리를 해 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프라이팬만 쳐다볼 따름이다.(아무렴, 기다리며 눈으로 먹는 때가 젤로 맛있는 법이지.)

아이들이 조물락거리며 빚은 떡. 손맛이 담뿍 담겨서 아주 맛나다. ⓒ정청라

마침내 맛있는 냄새가 부엌을 꽉 채우고 접시에 가지전이 수북이 쌓였다.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던 다울이가 갑자기 나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힘들게 요리하는 줄 알았는데 요리가 재밌기도 하네."

"엄마가 힘들어 보였어?"

"응. 근데 막상 해 보니까 재밌어. 엄마처럼 만날 하려면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래. 힘들기만 하면 못 하지. 힘든 것 속에 재밌는 것도 같이 들어 있으니까 하는 거야."

다울이와 그런 얘길 나누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자식이 점점 친구가 되어 간다는 느낌? 다울이가 어린 줄만 알았는데 조금씩 자라며 엄마의 역할과 처지를 이해해 준다는 느낌? 뭐 그런 느낌이 들면서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기까지 하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묘한 감정에 휩싸인 채 내가 양념 간장을 만들고 있는 사이, 가지전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희들끼리 맛을 본다 어쩐다 하더니 간장이 상에 놓이기도 전에 뚝딱 먹어 치워 버린 것이다.

"뭐야, 벌써 다 먹었어?"

"내 입맛에는 그렇게 맛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다랑이랑 다나는 너무 꿀맛인가 봐. 진짜 잘 먹네. 다음에는 엄마랑 아빠 것도 남겨 놓을게."

모처럼 자식이 해 준 음식 먹어 보려나 했더니 나는 맛도 못 봤다. 하지만 다울이의 요리 의지가 팔팔하게 꿈틀거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맛을 보게 되겠지. 아무래도 올여름엔 다울이의 요리쇼가 밥상을 환히 밝힐 것 같다.

누가 뭐래도 가장 견실한 견습생은 다나다. 밥상 차리는 것부터 치우는 것까지 신이 나서 거든다. 특히 행주질 하는 손은 어찌나 야무진지.... 물론 사고를 치는 날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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