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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부엌에서[부엌데기 밥상 통신 - 62]

봄부터 거의 매일, 빵을 구웠다. 빵만큼 지루하지 않은 간식이 없을 뿐더러 날마다 밥을 주며 발효종(빵 씨앗 요정)을 키우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이제 그만 뚝!' 하고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발효종을 넣어 빵을 반죽하고, 한두 시간 기다렸다가 모양을 빚고 그게 또 적당히 부풀어 오르길 기다려 빵을 굽는 나날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발효종에 밥을 주고(먹이기) 저어 주며(놀아 주기) 지속적 관계를 맺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랑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빵을 이렇게 자주 구울 바에야 차라리 전기 오븐을 하나 사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물건 하나 새로 들이는 게 영 거북스러운 일이라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데 생각할수록 가슴이 뛰었다. 오븐이 생기면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빵을 자유자재로 구울 수 있겠지? 가스 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무쇠냄비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게 보통 성가신 일이야? 오븐이 있다면 그런 수고는 안 해도 되니 얼마나 편할까? (무쇠냄비를 가스 불에 올리면 일정 온도 이상이 되면 '삐~' 소리가 나면서 가스 불이 자동으로 꺼져 버린다. 화재예방을 위한 필수 기능이라고는 하는데 무쇠냄비처럼 고온으로 달궈지는 제품을 올려 사용하기엔 영 불편하다. 가스 불이 꺼질 때마다 냄비를 다른 화구로 옮겨 불을 다시 켜야 하니까.) 그래, 이젠 나도 좀 편하게 살 때가 되었는지도 몰라. 어디 내어놔도 손색이 없는 번듯한 빵을 한번 구워 보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장이라도 전기 오븐을 들여야 할 것만 같았다. 꿈에 부풀어 인터넷 검색 시작! 과연 다양한 가격대의 다양한 제품들이 어마무시할 정도로 많이 나와 있었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라 주위에 오븐을 쓰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크게 비싼 제품을 사지 않아도 쓸 만하고, 전기세도 많이 나오지 않는 편이라는 희망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무얼 더 고민하리요, 그냥 눈 딱 감고 사면 되는 것이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막상 오븐을 사려고 하니 신랑도 나도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가뜩이나 비좁은 부엌에 오븐 자리 하나 만드는 것도 그렇고, 전자파도 신경이 쓰이고, 조리 환경에 어떤 한계 같은 것이 사라지면 내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말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결론은 아주 엉뚱한 것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부엌문으로 통하는 옆 마당에 (좀 더 활용도가 높은) 바깥 부엌을 새로 만들자는 것!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어쩐지 후련한 느낌이 들면서 온갖 잡생각이 다 사라졌다. 성격 급한 신랑은 당장 그동안 모아 놓은 여러 재료를 싹싹 긁어모아 화덕 만들기 실험에 들어갔다. 앉아서 불을 땔 수 있는 구조로 해서 황토 벽돌과 내화벽돌을 쌓고, 화구 위에 철판을 깔고, 굴뚝을 내고, 다울이까지 가세하여 화덕에 흙 미장을 하고... 그렇게 이삼일 사이에 화구를 세 개나 갖춘 화덕이 만들어졌다. (아주 그럴듯한 모양을 갖춘 멋스러운 화덕은 아니다. 하지만 뭐 그게 우리 집 스타일인 걸 어쩌랴. 중요한 건 쓸 만하다는 것!)

화덕 만들기 실험 중~ ⓒ정청라
화덕 완성! 매끄러운 걸 좋아하는 다울이, 아빠의 화덕이 지저분해 보였는지 직접 흙 미장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정청라

자, 그것으로 끝이냐고? 그럴 리가!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지붕을 내는 것이었다. 비가 올 때, 햇빛이 쨍쨍할 때도 부엌을 쓸 수 있어야 하니까. 그리하여 본체 지붕에 덧대어 새로 지붕을 달아내고 원래 그 자리에 쟁여 놓았던 땔감 더미도 다시 쌓았다. 내친김에 부엌 벽 쪽으로 신발장도 만들었다. (신발장 만들기는 내가 오래도록 요청해 온 숙원사업이었다.) 그렇게 공사가 마무리되어 지붕만 있고 앞뒤가 뻥 뚫린, 그래서 실내인지 실외인지 알 수 없는, 실내이기도 하고 실외이기도 한, 독특한 느낌의 바깥 부엌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야생의 부엌!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야생의 부엌이 생긴 게 지난 4월 중순쯤 일이니까 그동안 석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처음엔 흐뭇한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며 '좋아 보이는구나' 감상만 했다. 신랑이 불을 때려고 나서야 냄비를 바깥으로 옮기며 신랑의 행동을 구경만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일상적으로 불 때서 밥하는 일과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불 때는 감각 자체가 무뎌진 모양이다. 그게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만 여겨졌다.) 그러다가 "밖에다 부엌은 왜 만들자고 했어요?" 하는 신랑의 핀잔을 듣고 나서야 내가 직접 화덕 아궁이 앞에 앉았다. 앉아서 막상 불을 피워 보니 생각보다 불이 잘 피어올랐고 화덕에 불도 잘 들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불 앞에 앉아 있을 때 묘한 평온함을 느끼는 내 몸의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래, 나 불 때는 거 좋아하는 여자였어!

그 뒤로 야생의 부엌은 우리 집에서 가장 핫한 공간이 되었다. (장마철 시작될 무렵부터는 이용이 좀 뜸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곳에서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거리며 웃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덩달아 수많은 이야기가 태어났다. '맛있는 온기에 도취되어 몰려드는 파리 떼와 파리 사냥꾼 다랭이', '누가 빵 껍질 뜯어 먹었지?'(범인은 다나!), '게으름뱅이 다울이가 나무꾼이 되었어요', '다나도 피자 만들 수 있어요', '다랭아, 돌떡이 얼마나 뜨거운 줄 이제 알았지?' 같은 이야기들... 뭐 시답잖은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 주인공인 아이들 사이에선 두고두고 회자되며 먼훗날까지도 야생의 부엌을 떠올리지 않을까? 고생스러울 게 뻔한 제3의 길에 접어들어서도 내가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건 바로 그런 이야기들, 애틋하고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을 잣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빵을 구우며 빵을 먹는 시간은 정말 즐거워. 빵이 많이 탔음에도 맛있게 먹는 아이들. ⓒ정청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꿀빵(구운 호떡 같은 것) 한 소쿠리. 장에 팔러 나가 볼까요?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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