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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그릇[부엌데기 밥상 통신 - 58]

친정 엄마는 손이 아주 크다. 뭐든 만들면 넉넉해서 이 집 저 집 퍼 주고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 먹인다. 그런데 나는 엄마를 안 닮았다. 내 딴에는 넉넉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해 놓고 보면 양이 얼마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반찬을 만들면 한 끼니 분량으로 똑 떨어지는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그때 만들어 싹싹 해치우니 개밥거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 형편인 것이다. 음식을 남기면 남긴 거 죽어서 다 먹어야 한다는데 남기는 게 없으니 죽고 난 뒤에까지 해야 하는 숙제는 없구나 싶어 홀가분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늘 안타까움이 있다. 나란 인간은 내 식구나 겨우겨우 먹여 살리는구나. 언제쯤 손이 커져서 크게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두루두루 나눠 먹으며 살 수 있을까? "부침개를 부쳤는데 저희 식구 먹기엔 너무 많아서요." 하면서 옆집에도 가고 앞집에도 갈 수 있을까?

일부러 나눠 먹을 요량으로 작심을 하지 않으면 잘 안 되는 일이라 아주 가끔은 단단히 벼르며 마음을 낼 때가 있다. 제사나 생일 같은 때, 모처럼 방앗간에서 떡 해 왔을 때.... 이번 다랑이 생일 때도 그랬다. 생일 선물로 먹고 싶은 거 하나를 말하라고 했더니 주저 없이 딸기케이크라고 하기에 며칠 전부터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인터넷으로 딸기를 주문하고, 방앗간 가서 쌀가루 빻고, 생일 하루 전날 딸기잼과 두부딸기크림을 만들어 두고, 생일 당일에 떡을 쪄 내고.... 나름 미리미리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넉넉히 만든다고 만들어 집집마다 한 조각씩은 돌릴 수 있을 만큼 만들었다. 한데, 아이들이 맛있다며 더 달라 더 달라 하는 통에 이웃에 돌릴 것까지 거의 다 먹어 버렸다. 앞집 할머니가 놀러 오셨기에 겨우 하나 손에 안기고 나머지는 다 식구들 입 속으로....

허망했다.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또 내 식구 밖으로 나가지 못했구나. 다행히 크림은 아직 남아 있어서 고민이 되었다. 내일이라도 떡케이크를 다시 해서 돌릴까? 힘드니까 그냥 넘어가고 싶었지만 모처럼 마음을 냈으니 불씨를 살려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떡을 쪄서 케이크를 돌렸다. 그러고 나니 헉헉 숨이 찼다. 꼭 해야 할 일도 미뤄 두고 쌓아 두고 있는 형편에 내가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받는 입장에서는 이게 뭔 맛이여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는데.... 신랑도 별말은 없었지만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웃에 돌릴 떡을 장식 중인 아이들 모습. 크림 바르고 딸기와 골담초로 꾸미고! 아이들은 "엄마, 우리 먹을 것도 많이 남았지?" 몇 번이나 확인했더라는...ㅠㅠ ⓒ정청라

그러니까, 왜냐하면, 굳이 속을 탈탈 털어 조사를 해 보자면, 나는 다른 데 눈 돌릴 틈 없이 나 사는 데만 몰입해 있는 삶에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준 것보다 남한테 받은 게 훨씬 많은데 이걸 되갚지 못하고 사는 데 대한 빚진 마음이랄까? 아직은 시기적으로 애들이 어리니까 나눌 것보다 채울 게 많은 걸 어쩌겠냐며 자기합리화를 해 보려고 해도 잘 떨쳐지지 않는 생각이다. 2년 넘게 부엌데기 밥상 통신이라는 칼럼을 맡아 연재를 하면서도 내심 부끄러웠다. 아니, 내 식구 겨우겨우 먹여 살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세상을 등진 채 소심하게 내 밥상 안에서만 활보하는 주제에 무어 크게 할 말이 있다고....

아무튼 나는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 나가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짜잔 하고 손 큰 사람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는 만큼 아주 조금씩이라도 해 버릇해서 1밀리라도 그릇을 키워 보려고 말이다. 아니, 그릇을 키운다기보다 작은 크기 몫이라도 내 몫을 떳떳하게 감당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난 그릇이 작아서 안 돼' 하고 마냥 뒷짐 지고 있기보다 작으면 작은 대로 내 역할 감당하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재미난 이야기가 떠올랐다. '개미 그릇'이란 제목의 이야기....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들려 줬더니 반응이 나쁘진 않다. 심지어 다울이는 자기가 그림을 그려 주겠다며 다음 날 당장 이야기에 맞는 삽화까지 여러 장 그려 주었다. 우와!

이렇게 해서 이야기 하나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다울이와 나의 첫 공동 작업물~ 어설프지만 짜잔!

많은 것을 담아 많은 것을 나누고 싶은 그릇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릇은 다른 친구들 곁에 있으니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졌습니다.
어, 내가 그렇게 큰 그릇은 아니었네? 난 작은 그릇이구나!

어, 내가 그렇게 큰 그릇은 아니었네? 난 작은 그릇이구나! ⓒ정청라

그릇은 시무룩해졌습니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거든요.
무얼 담아 나눌지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한순간에 꿈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밥상 위에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수밖에요.
밥그릇이 되고 국그릇이 되고 반찬 그릇이 된 친구들은 정말이지 멋져 보였습니다.

그릇은 밥그릇, 국그릇이 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정청라

그때였습니다.
개미 떼가 나타나 낑낑, 그릇을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에겐 네가 필요해."
"내가 필요하다고? 나 같은 게? 보다시피 난 아주 작아."
"무슨 소리야. 넌 정말 커."

그릇은 이제 개미들의 공동 밥그릇이 되었습니다.
개미들은 그릇을 "거대한 밥 놀이터"라고 부릅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나 같은 게? 보다시피 난 아주 작아.", "무슨 소리야. 넌 정말 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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