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64]

더워도 너무 덥다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이 여름의 일상을 꾸려 가고 있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 선선한 시간에 바지런하게 움직여 애들 아침 먹이고 개밥 주고 아침 운동, 그 다음엔 점심 준비를 하고, 빨래, 청소 같은 일들도 한다. 그러다가 오전 11시쯤 점심을 먹고 치우는데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는 시간이다. 애들이 땀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 얼른 샤워 한번 하고 오라고 한 뒤에 더운 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 긴 낮잠을 잔다. (너무 더워서 잠이 오냐고? 다행히 안방 바닥이 흙바닥이라 매우 차갑고 시원해서 낮잠 자리로는 그만이다. 차가운 방바닥에 몸을 찰싹 붙이고 앞판 뒤판 번갈아 가며 시원한 기운을 흡수하면 선풍기 한 대만 틀어 놓고도 버틸 만하다.)

한참 자다 보면 선풍기 바람이 더 이상 시원하지 않고 뜨거워지며 몸을 둘러싼 더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걸 느끼는데 그때가 더위의 정점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충 오후 세 시에서 네 시쯤? 이때 애들도 나도 잠에서 깨어 간식을 먹으며 더위에 지친 몸의 고단함을 달래는데, 한동안은 대체로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 냉장실에서 막 꺼낸 시원한 미숫가루나 두유, 매실차 같은 것, 가끔은 과일주스나 오미자물을 얼린 얼음 같은 것도.... 평소 물도 냉장실에 두고 먹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음식을 멀리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더울 때는 어쩔 수 없지 않겠냐며 나름 타협을 한 건데, 그러다 보니 뱃속이 편하지를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도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차에 다울이가 목감기를 앓게 되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결정적 계기는 냉수! 집에 손님을 치르면서 손님들한테까지 실온수를 줄 수는 없어서 물 한 병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 와 더워하면서 물을 달라기에 무심코 그 물을 내어 따라준 것이다. '너무 차가운데 괜찮을까?' 싶었지만 '설마 당장 별일이야 있겠어?' 했는데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울이가 갑자기 너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엄마, 마실 때는 시원하고 좋았는데 먹자마자 가슴이 답답해."

"동의보감에 여름에 찬 것을 많이 먹으면 폐기가 상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래서 그런 건가?"

"맞아, 나 지금 숨 쉬기가 너무 힘들어. 나 이제 찬물 안 먹을래!"

냉수 한 잔에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기도 했지만 다울이는 그날 밤부터 열이 오르며 목이 붓고 감기 증상을 보였다. 다음 날은 다랑이까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며 십여 년 전 내가 인도 여행에서 만난 시골 아이들이 떠올랐다. 당시에 나는 선교 여행차 인도 남부의 오지 시골 마을로 가게 되었는데 날씨가 더우니까 얼음물을 잔뜩 챙겨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무심코 그 물을 내밀었는데 아이들이 물이 너무 차갑다며 아예 마시지를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차가운 걸 어떻게 먹냐는 듯 신기한 눈으로 내가 물 마시는 걸 구경만 할 뿐. 그때 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울 때는 냉수가 당연한 거라고 여겼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그렇지가 않다니!

그 일이 있고 한참 뒤에 나 또한 냉수의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냉수뿐 아니라 냉장고에서 바로 나온 시원한 음식이 몸에 남기는 좋지 않은 느낌까지도 감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더운 여름 한철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반찬을 냉장실에 넣지 않는다. 사실 사철 냉장고에 보관하는 김치조차 먹기 한 시간쯤 전에 미리 꺼내 두었다가 실온이 되었을 때 먹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랬는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틈을 타서 내 감각이 많이 무뎌졌었나 보다. 아이들 목감기를 계기로 비로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따듯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박하잎 따서 박하차, 차조기잎 따 넣고 차조기차, 지난해 썰어서 말려 둔 생강 넣고 생강차, 친구가 베트남에서 보내 준 홍차.... 여름에 따듯한 차라니 생각만 해도 땀이 나고 더위가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는데, 이럴 수가! 차를 마시니 속도 편안하고 갈증도 쉬이 가시는 거다. 찬 음료를 마시면 마실 때 잠깐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아도 딱 그때뿐이지 않나. 그런데 차를 마시면 몸속 깊은 곳에 물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확실히 뭐가 달랐다. 아이들도 바로 느끼는 것 같았다.

"엄마, 물이 더 달아진 것 같아."(다울)

"차 마시면 더울 줄 알았는데 안 덥네."(다랑)

"또 차!"(다나)

그렇게 해서 아침 먹을 때, 오후 간식 시간, 자기 전, 이렇게 하루 세 번 정도는 따뜻한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동안 냉기를 멀리하는 소극적 방편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차를 마심으로 온기를 가까이 하는 적극적 방편으로 한 걸음 전진! 그랬더니 내 몸은 훨씬 더, 난폭한 여름 앞에서 의연해진 것 같다.

무더위야 물렀거라, 따듯한 차가 나가신다!

아침엔 누룽지와 차 한 잔! 아, 바로 이 맛이여~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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