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83]

당시를 온전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래서 너무 개탄스럽지만, 그때 내가 떨고 있었던 건 기억난다. 나는 겉옷을 벗는 것도 잊은 채 아무도 없는 집 안의 싸늘한 공기 속을 이리저리 서성였었다. 소파에 앉았다가도 튀어오르길 반복했고, 프흡! 으흣, 흐어엇! 입에서 바람을 뱉는 것처럼 웃었다. 살다 보면 이처럼 우습지 않은데 웃을 때가 있다. 울음이 웃음이 되어 나오거나 화가 나는데도 웃는 때가 있었다. 웃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날도 나는 잘 익은 밤송이가 툭 하고 벌어지듯 공기를 툭, 투둑, 토해 내며 웃음을 뱉어 냈었다. 슬픈 것도 같고 기쁜 것도 같았고, 몸이 붕 뜨는 것도 같다가, 아래로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처음인 것도 같았고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언제였지? 골치 아픈 시험이 끝나던 날?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그때도 설렜던 것 같은데.... 내 앞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내가 대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가벼워져 햇살에 마구 섞이던 날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딘지 초조하고 가슴이 아리기도 하니까. 나는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를 꺼내 컵에 따랐다. 보리차는 차가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리차를 들고 마시는 내 손가락마저 축축하게 물기 어리자 나는 불현듯 옷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고는 작정한 듯 핸드폰을 들어 문자판을 맹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것 없이 ‘처음’이니 ‘자유’니 하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로는 지금 어린이집에 가 있어. 나는 시댁에 와서 대기 중이고. 로를 데리러 가기까지 약 한 시간. 그동안은 자유야. 육아 인생 처음 맞는 자유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그랬다. 그날은 로가 어린이집을 처음으로 혼자 들어간 날이었다.

3월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글을 그때그때 쓰지 못하니 맨날 거슬러 올라간다) 3월 하늘을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최초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 울렸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앞에서는 더욱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주변엔 꼭 엄마들이 문 앞과 담장 아래서 꼼짝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사설탐정처럼 닫힌 문 너머를 기웃거리며 귀를 쫑긋하고 세우고 있었다. 우리 애가 언제 울음을 그칠까. 가슴을 졸이며 안테나를 세우고 있으면 비슷하게 걸음을 못 떼는 다른 엄마를 만나게 되는데 같은 처지는 언제나 통하는 게 있다. 댁의 아이도 이번에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요? 네, 아이가 영 안 떨어지려고 해서요. 지금 우는 아이 있죠, 그 애가 제 딸이랍니다. 아아, 이걸 어째요. 쿨쩍. 제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걸까요? 하고 서로 물었다. 그처럼 우리 각자는 완연한 봄 이전에 위태로운 3월의 햇살과 바람 한가운데를 지나쳐 온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로. ⓒ김혜율

그 전에 나는 홋카이도 여우의 일생을 다룬 동화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야생 여우의 생생한 사진에 맞춰 이야기를 구성한 책이었다. 봄에 태어난 아기 여우가 가까스로 굴 밖으로 나와 엄마가 잡아다 주는 먹이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 꼬마 여우가 된다. 가을이 되자 스스로 사냥하는 법을 터득하더니 엄마와 작별해서 결국 홀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어른 여우가 되어 간다는 이야기였다. 내 시각으로 보면 이른 이별이지만 그들 세계에선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섭리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석양에 붉게 물든 여우가 홀로 세상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꼭 외로워 보이지만 않았던 이유였겠지. 그럼 여우가 아닌 사람은 언제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 단계의 독립이 있겠지만 일단은 엄마의 손길을 벗어나서 처음 사회생활을 하기에 적정한 때가 언제냐 말이다.

자연은 우리에게도 그 답을 준비해 놓았겠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듣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더 쉽게 듣는다. 그런데 마침 홋카이도 여우가 어른이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소아과 의사가 내게 말했다. 로의 영유아 검진결과를 보며 의사는 아이가 정상인 것은 맞(겠)지만 소근육 발달도와 사회성 점수가 낮게 나왔으니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처럼 아이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아이를 (방치하여 바보로 만들지 말고)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 로에게 단추 잠그기나 콩 한 알씩 집기 놀이를 시키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되었다. 키즈카페에 데리고 가서 또래랑 놀 기회를 주지 않은 것도 엄마로서 직무를 유기했나 싶었다. 발달 문항표에 솔직하다 못해 너무 야박하게 점수를 준 것도 후회되었지만 점수로 환산된 결과지 앞에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네. 안 그래도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했어요.’라고 고개를 반복해 끄덕이며 얼굴이 벌게진 채로 소아과를 나온 것이 기억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그것도 만 세 돌이 다 되어 가는 아이, 셋째나 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무에 그리 떨리는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일이 세상 제일 힘든 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메리가 세 살밖에 안 된 아기였을 때 어린이집에 가서 적응을 못했던 것이 내게도 강렬한 경험이 되었던 거다.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엄마가 매일 아침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은 버림받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전문가의 말마따나 메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었고 그로 인해 나 또한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그래서 또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났던 나는 욜라는 어린이집에 보내지도 못했고, 로는 자꾸 육아휴직을 연장해 가면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그 시간들을 사는 중에는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순간순간 힘이 들었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변화는 더 두려웠다.

막내 로마저 내 품에서 떠나 어린이집에 가면, 나는 지금처럼 어린 시절의 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엄마로써 해 왔던 역할도 끝이 나면서 나도 다시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어린이집은 겁나지, 다시 못 오는 시간들은 아쉽지, 다가올 변화는 너무 두렵지, 그러니 결심이 자꾸만 늦추어지게 된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는 노릇. 엄마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세세만년 아이와 함께일 수는 없을 것이다. 소중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고 언젠가는 내게서 떠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마도 아이도 한 사람으로 독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엄마도 아이도 서로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이 가르쳐 주는 최소한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로. ⓒ김혜율

때마침 홋카이도 여우가 내게 영감을 줬고, 소아과 의사의 꾸지람도 들었던 터라 나는 그동안 망설이던 결심을 확고히 하기로 했다. 그래, 지금이야. 로가 만 3세를 앞두고 있고 나도 복직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때, 로를 어린이집에 보내 보자. 그래서 그놈의 소근육도 발달시키고 사회성도 쫘악 끌어올려 보자고! 로가 배꼽 손을 하고 공손히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면 나도 ‘그래, 안녕! 이따 보자.’ 하고 쿨하게 내 갈 길 가 보자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전 모호한 상태에서 어떤 새로운 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등원 첫날, 만 2세 반 교실이었다. 교사 두 명이 아이들 여덟 명을 돌본다고 했다. 어린이집마다 아이 적응을 위해 엄마들에게 요구하는 지침이 다른데, 이 어린이집은 머무는 시간이 첫날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될 때까지 엄마가 약 이 주 동안은 아이와 같이 어린이집에 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집에 따라온 엄마는 나뿐이었다. 로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닌 아이들로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서 이번에 형님반으로 진급한 것일 뿐 이미 적응을 한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3월의 어린이집 첫날은 난리도 아니었다. 로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어린이집에 들어갔더니 어떤 아이 한 명이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며 몇 번이나 토하다 울면서 엄마를 찾았고,(하지만 엄마는 일하러 가셨고) 어떤 아이는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한 시간 동안 밖에서 아빠를 찾으며 울었고, 어떤 아이는 잘 놀다가 갑자기 바지에 오줌을 줄줄 싸고, 어떤 아이는 자빠져서 울먹이고, 어떤 아이는 다른 교실에 가서 방황하다 잡혀 왔다.

두 선생님은 신입생인 로한테는 관심을 기울일 틈도 없어 바쁘게 움직이셨다. 어차피 로는 나한테 착 달라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아서 할 게 없었지만 로와 한 몸처럼 이동하는 나는 마치 소인국에 들어온 거인처럼 몸이 둔했다. 로만큼 나도 긴장했다. 교실을 두리번거렸고 시계를 자꾸만 쳐다보았었다. 그렇게 2주 동안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로와 함께 어린이집을 나서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나는 로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도 무사히, 적응을 했습니다.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같이 따라가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게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로 혼자만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돌아 나온 날,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보리차를 마시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던 거다. 비슷한 문자를 남편에게도 보내고 나서야 겉옷이 답답하게 느껴진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맞는 육아해방의 첫날. 나는 지난 시간을 단순하게 떠올렸다. 한 아이가 내 손을 놓자마자 다른 아이가 내 손을 잡던 빈틈없던 세월이었다. 아이들을 다 학교로, 유치원으로,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빈 집에 홀로 앉은 엄마는 다 이런 기분인 걸까. 나는 모호함으로 가득 찬 벅찬 그 순간이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띠롱. 띠롱. 아까 내가 보낸 문자에 대한 회신이 속속 당도하고 있었다.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는 축전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첫발을 내미는 아이의 밭 끝에, 직전까지 수고한 엄마의 작은 가슴 위에, 그리고 아이와 엄마 앞에 펼쳐지는 미래에 건네는 격려의 인사였다. 나는 앞으로도 이 때를 기억하려 한다. 만약에 그런다면, 내가 그날의 그 감정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그 어떤 지루하고 힘든 오늘도 그날의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P.S: 그 이후로 나는 로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낮잠도 자고 드라마도 보고 라면도 끓여 먹으며 살고 있다. 그때의 그 설렘, 벅찬 감동은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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