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84]

복싱장에 다녀온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나 이번에 복싱대회 나가려고!”
“하하하. ”

웃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기뻤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복싱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어. 그런데 관장님이 다가오더니 ‘이번 대회는 나가셔야죠?’ 그러는 거야. 저번에도 그랬고 저저번에도 그랬잖아. 내가 좀 소질이 있나 봐.” 남편은 웃다가 흠칫했다.

“진짜.... 나가게?”
“응. 왜....? 맞으면 아플까 봐?”

남편은 내 말이 그 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프긴 하겠지만.... 에헤헤. 뭐 얼마나 맞겠어.... 그래도 아마추어 복싱대횐데.”

남편은 내가 상대방 선수한테 얻어터질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훗.”하고 웃어 주고는 창문을 거울 삼아 섀도복싱을 하기 시작했다. 쨉! 쨉! 원, 투! 원, 투! 쨉! 쨉! 날 저물어 가며 점차 검어지는 유리창의 바깥 너머로, 밝은 실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불 밝힌 이 집에서 한 여성 복서가 맹훈련 중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훈련이 시작된 지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복서는 숨을 헐떡인다.

“헉, 헉, 헉. 내가 왜 나가려고 하는 줄 알아? 애들 때문이야. 헉! 애들한테 헉! 보여 주고 헉! 싶어서. 헉! 헉!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으허헉! 크학! 도저히 못하겠다. 흐아. 흐아.”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내 등 뒤로 남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진짜 괜찮으려나.... 얼굴 맞으면.... 부어서 한참 갈 텐데....”

복싱대회 후유증이 남은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입술은 찢어져 있겠지. 눈티 방티 된 채로 학교 참관수업에 가서 담임선생님한테 인사를 한다? 학부모 모임에 가서 엄마들을 만난다? 몇 년 만에 사무실에 출근한다?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어쩌지. 국가대표 출신 관장님의 대회 대비 특훈을 받는다면 (별로 맞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 보겠건만 대회가 임박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훈련이 이어졌다. 줄넘기부터 복싱 기본기 5단계에 섀도 복싱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한 방에 쓰러뜨릴 비법은 언제 전수해 주실까.

하루는 관장님께 여쭈었다.

“관장님! 저.... 괜찮을까요? 대회는 아무래도 안 나가는게....”

그러자 관장님 왈.

“무슨 소리에요. 나가야죠! 왜요? 겁나요?”
“아니요, 아, 네! 겁도 나고요. 사실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그러니까 빨리 비법을 전수해 달란 말예요.)”

그러자 관장님,

“가서 못하겠다 싶으면 안 해도 되요. 그냥 남들 어떻게 하나 구경하러 가는 거예요. 소풍 간다 생각하고....”
“소풍이요? 아.... 네.”

관장님의 소풍 발언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번 대회, 최선을 다해서 승리를 노려 보겠지만 상황을 봐서 상대가 너무 강하면 적당히 하고 져야겠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래도 복싱대회에 나가느냐 마느냐 하는 번민은 끊이질 않았다. 그걸 어찌 아셨는지 프로 관장님은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복싱 좀 한다 하는 사람들만 신는 눈부시게 빛나는 새 복싱화를 내 앞에 펼쳐 놓으시기도 하고, 상대의 주먹에 맞고도 이가 부러지지 않도록 이에 끼우는 투명하고 말랑한 마우스피스를 꺼내 보이기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복싱화도 사고 마우스피스도 샀다. 네임펜으로 이름도 쓰고 침도 묻혀서 이제 반품도 못한다.) 시간이 가도 내 복싱 실력은 변동 없이 제자리건만, 대회 날짜만큼은 야금야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복싱대회, 나가도 괜찮을까? (이미지 출처 = Pxhere)

복싱대회 측은 대회 사나흘 전에 신청자를 남녀별, 나이별, 체급에 따라 세분화하여 토너먼트식 대진표를 내 놓는다. 대진표가 나오면 시합 전에 대회 참가자는 누구누구랑 몇 번을 겨뤄야 하는 지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진표가 나오는 중대한 날, 꼭 나오라는 관장님의 당부에도 나는 체육관을 빠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내리 사흘을 빠졌다. 불현듯 복싱대회에 나가서 승부를 겨루는 것도, 경험을 쌓는 것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 같은 거 포기하고 성한 얼굴로 맘 편하게 살고자 하였다. 

대회 전날, 나는 마치 인생 패배자가 된 듯 무안하고 씁쓸한 얼굴로 어슬렁어슬렁 체육관으로 향했다. 비록 대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오늘의 기초체력은 길러야 했기에. 관장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까. 그냥 뚜드려 맞는 게 너무 두려웠다고만 하자. 누구를 때리기엔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같다고 하자. 새로 산 복싱화는 딸이 크면 물려줄 생각이고 마우스피스는 기념품으로 갖겠다고 하자....

대회 전날의 복싱 체육관은 그 어느 때보다 한산했다. 선수들 서너 명이 힘을 아끼듯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관장님은 그 전일부터 개최되고 있는 전국소년체전 선발전에 지도자 자격으로 참가 중이라 안 계시고, 대신 관장님 친구이자 전직 복싱선수, 몸은 굳었지만 열정은 식지 않아 끊임없이 자세나 복서의 마음가짐 전반을 교정해 주시곤 하는 코치 선생님이 계셨다. 마침 코치는 훈계 중이었다. 상대는 내일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루키다. 자신의 주먹 데뷔전을 앞둔 젊은이는 눈을 퍼렇게 빛내며 코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하고 있었다.

“너, 그냥 죽자고 덤벼들면 안 된다. 좀 맞으면 어때, 하고 맞서 봐야 아무 소용없어. 상대랑 맞붙어서 딱 기술에서 밀린다 싶으면 힘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같은 체급끼리 그게 통해? 그냥 밀리고 죽어라 맞는 거야. 그렇게 맞으면 뭘 해? 몸 상하는 너만 손해야. 그럴 땐 빨리 수건 던지고 포기해. 응?”

비실비실 몸을 움직이면서 코치에게 언제 대회출전 포기의사를 전할까 눈치를 보던 나는 코치의 말에 의아했다. 관장님은 신성한 복싱대회를 소풍가듯 가라고 하질 않나, 코치님은 유사시 싸우지 말고 재빨리 수건을 던지라고 하질 않나, 다들 왜 그러시냐 말이다. 루키도 딱 내 마음과 같았는지 자신의 주먹을 머쓱히 내려다보며 좀체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코치는 큼큼 목을 한번 가다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너, 그 주먹으로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상대 선수 모조리 다 때려눕히고 복싱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돼서 세계를 제패하는 풍운아가 되어....”

나는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코치는 루키들이 빠질 수 있는 과대망상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혹시나 나에게 숨겨진 복싱 재능이 있지 않을까, 내 주먹이 너무 빠르고 세서 다들 기절하면 어쩌지 하는. 루키도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어느덧 서슬퍼런 눈빛이 바뀐다. 아 그런 거군요,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락 된 듯하자 코치가 이제 내게 아는 체를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 망설이지 말고 지금 말해. 못하겠다고. 대회 포기하겠다고. 어서. 두런두런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코치가 먼저 말했다. 역시 전직 복서라서 빠르게 치고 들어온다.

“이번에 대진표 보셨죠?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이에요, 금메달!”
“네? 그게 무슨....?”
“아, 못보셨어요? 같은 체급 출전 선수가 한 명뿐이에요.”
“한, 명....? 선수가 저 한 명이에요?”
“네에~ 우후후후.”

코치는 그것 참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얼굴로 내게 축하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나, 대회 안 나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이라고? 싸우지도 않고 자동으로? 그래도 되는 걸까? 아니, 안 나가면 손해인가? 이거, 어찌해야 하는 거지?

“근데, 전.... 대회 안 나가려고 했는데요.”

"엄마, 정말 대회 나가는 거야?" ⓒ김혜율

내 말에 코치 눈이 동그래졌다. 코치의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또 언제 복싱대회에 나갈 수 있겠느냐,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게다가 금메달이 아니냐. 아이들한테도 복싱대회장은 참관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금메달 목에 걸고 딱 사진으로 남겨 놓으면 평생 가는 거 아니겠냐면서 쉴 새 없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무엇보다 아까 코치한테 한 방 먹은 루키 듣기에 부끄러웠다. ‘복싱계의 풍운아 망상’ 지적 이후로 어쩐지 주먹이 느려진 것 같은 루키가 싸우지 않고도 자동으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대회규정에 대한 부조리와 불공평함에 더 좌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코치의 입을 막듯이 서둘러 말했다.

“네, 네. 알았어요. 나갈 게요. 대회.”

그렇게 하여 나는, 대회 출전 포기의사를 확고히 하던 복싱대회 전날에 자그마치 금메달을 예약하게 된다. 제2회 전국복싱협회장배 충남생활복싱대회 원더급 50키로 체급에 출전한 선수가 나 혼자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금메달은 내 것.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없던 힘이 샘솟았다. 루키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금메달을 따고야 말겠다. 땀 없이 받는 금메달이 어디 있을까. 나는 서 있는 제자리에서 열을 다해 뛰었다.

p.s 녹록지만은 않은 복싱 금메달리스트에 이르는 길, 그 뒷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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