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환의 세상잡설]

‘너 빨갱이지’ → ‘너 종북이지!’
매카시스트 박정희가 매카시즘을 비판했다고?

“빨갱이다. 법을 위배했다. 뭐 뭐다 해 가지고 국민들한테 매일 떠들고 선전하겠다는 그런 주장인데 우리 국민들은 그런 낡은 수법에 넘어가지 않습니다.”(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1963년 10월 3일 광주 유세)

사전적 정의로 ‘종북’(從北)은 “주체사상과 같은 북한의 체제를 흠모하고 그에 따름. 또는 그러한 태도”를 일컫는다. 어떤 진보적 의제나 북에 대한 화해적 또는 비적대적 태도 등에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본질은 극도로 흐려지며, 혼탁한 양상으로 접어든다. 이 말은 한국사회가 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꽤 움칠하게 하고 발목 잡는다.

원래 ‘종북’은 민주노동당이 일심회 사건으로 내분을 겪을 때, 민중민주(PD) 계열에서 민족해방(NL) 계열을 ‘종북주의’로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내분을 겪은 뒤 분당되었다. 민주노동당 마포갑 지구당 모임에 꾸준히 참석했을 때, 사상으로 단련된 사람도 있었지만 소박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민도 있었다. 조금씩 진보정당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가고, 2004년 탄핵국면 이후 총선거에서 지역구 2명, 비례대표 8명이 당선되어 대약진을 했다. 그때 막판 노회찬과 김종필의 맞바뀜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선거운동 구호는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 12번이 살리겠습니다’였다. 선거 당일 오후에 투개표 일을 마무리하고, 마포갑 선거사무실에 갔을 때, 김혜경 대표가 감격에 차 벅찬 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당 안에서 불안 불안한 조짐이 있었다. ‘저 친구 NL이야’, ‘저 친구 PD야’, ‘저 친구 다함께(IS 계열)야’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고야, 여기서도 정파놀이 하고 있구나!’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은 ‘한밤의 꿈’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당의 내분 과정에서 나온 ‘종북’을 극우세력이 도용하였다. 이 말은 기존에 쓰였던 아주 식상한 ‘빨갱이, 용공, 친북’을 부드럽게 대체했다. 이런 말들처럼 한국사회에서 막강한 흑마술을 발휘한 말이 있을까? 박정희가 대선 과정에서 과거 남로당 이력을 공격받자 ‘낡은 매카시즘적 수법’이라며 응수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완전 소 여물 먹고 트림하는 소리다. 매카시즘 들먹였던 박정희 때, 한 크레용 회사 대표가 크레파스 이름으로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를 썼다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는 코미디 같은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외에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경향신문> 1969년 6월 9일자 기사.

최근 남북의 평화 관계 조성을 통해 가장 기쁜 것은 이제 ‘종북’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미 예전부터 약발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종북’이든 ‘빨갱이’ ‘용공’이든 한국사회를 좀먹었던 폐악이고 치 떨리는 흑마술이고 적폐 중의 적폐다. 하여튼 이런 어이없는 말들이 곧 박물관에 처박힐 생각을 하면 엄청 설렌다.

말의 전쟁, 우리의 투쟁은 말을 올곧이 세우는 과정

예전 도덕 또는 국민윤리 시간에 이념교육을 받을 때, 공산세력의 언어혼란 전술에 관해 들어 봤을 것이다. 공산주의 세력은 ‘민족’ ‘계급’ ‘부르주아’ 같은 용어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 식으로 전유해 민중을 헷갈리게 하며 선전 선동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용어라는 것은 어떠한 용례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갈린다. 같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써도 마르크스의 용례가 다르고 이후 그람시 같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의 용례가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한의 반공주의 극우정권과 자본만큼 언어혼란 전술을 잘 써먹었던 세력이 있겠는가 싶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랬고, 최근에 논란이 된 자유민주주의만 해도 그렇다. 사실 극우정권이 떠들었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는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민주’는 완전 개무시했던 것이 아닌가. 자본은 어떻고. ‘근로’라는 말을 앞세워, ‘노동’이라는 단어를 경시하거나 불온시하게 하고, ‘고용불안'의 또 다른 이름인 '유연성’을 기업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이런 여러 말들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교묘하게 사용자의 시선으로 작동되어 많은 이에게 옮겨 퍼진다.

“어찌하여 4.19는 의거이고요 어찌하여 5.16은 혁명인가요. 에야디야 에야디야 서글픈 나라 에야디야 에야디야 해야 솟아라.” 이런 민중가요 가사가 있다. 과거 지배세력은 우리 역사용어를 두고 극도의 언어혼란 전술을 펼쳤다. 아직도 습관적으로 ‘광주사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거치면서 이런 용어를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5.16은 혁명에서 군사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으로, 4.19는 의거에서 다시 혁명으로,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어떻게 지칭하는가는 매우 의미심장한 결과로 이어진다. 모든 언어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 엄청난 물질적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난 뒤 해방 프랑스에서 독일 부역자를 처벌할 때, 언론인이나 문인에 대해 얄짤없이 불관용으로 임했던 것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거대한 싸움의 장이다. 그 싸움의 현장에서 오가는 말의 형국이 예전과 달라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발화되는 어처구니없는 말은 여전하지만, 예전에 엄청난 흑마술을 발휘했던 말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락하고 있다.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함은 여전히 반동의 힘은 막강하고, 충분히 세련된 형태의 언어혼란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싸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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