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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부엌데기 밥상 통신 - 55]

날씨가 따듯해지니 내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아침 운동을 마치면 몽땅 밖으로 튀어 나간다. 그리고는 손에 모종삽이나 호미 같은 거 하나씩 들고 땅 파기에 돌입, 멀쩡한 밭 여기저기를 후벼 파기 시작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이들 셋이 모여 앉아 땅을 파는 데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한 폭 그림같이 아름답다.

'저 녀석들 이제는 알아서 잘 노는구나.' 싶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 이럴 수가! 자세히 보니 이건 좀 심하다 싶다. 밭에 땅굴이라도 팔 속셈인지 너무 깊이 파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야, 나무 뿌리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밭 함부로 건드리지 마. 마구 파헤치면 더 단단해진다고! 다나야, 마늘 밟으면 안 돼!"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이 작은 무법자들은 점점 더 영역을 넓혀 가면서 밭 여기저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기를 쓰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찬찬히 머리를 굴려 다울이와 협상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울아, 잠깐 이리 좀 와 봐."
"왜?"
"너희들이 마음대로 써도 좋은 땅을 줄게. 단감나무 둘레 어때? 여기 밭 입구부터 단감나무 있는 데 주변으로 밭두둑 하나까지."
"괜찮긴 한데 조금만 더 넓혀 줘. 놀이동산도 하나 만들어야 하거든."
"좋아, 그럼 이만큼 더!"

내가 밭두둑 옆으로 50센티 정도 되는 거리 만큼 땅을 더 허락하자 마침내 협상이 성사되었다. 어차피 단감나무 둘레는 밭에 그늘이 지기도 하고 아이들이 하도 들락거리는 통에 뭘 심어 가꾸기가 어려운 터라 차라리 아이들 영역으로 넘겨주고 만 것이다.

"야호, 우리에게도 땅이 생겼다! 다랭아, 여기다가 집 지을까?"
"응! 감나무 아래에 집 짓자! 근데 어떻게 지어?"

둘은 집을 어떻게 지을까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나 역시 궁금했다. 과연 어떤 집을 지을까? 그럴듯하게 지어 낼 수 있을까?

재료를 찾으러 부산하게 움직이던 다울이가 들마루(평상)를 짜는 데 썼던 빛바랜 대나무를 모아서 집터로 옮겼다. 그리고는 인디언 티피 비슷한 구조로 뼈대를 만들어 꼭대기를 끈으로 묶더니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엄마, 천막 뼈대는 다 완성이 됐는데 덮을 게 필요해. 이불 하나 써도 돼?"

안 된다고 하려고 했는데 다울이의 들뜬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어른 도움 없이 혼자서 다 알아서 하는데 이 정도 뒷바라지쯤이야' 하고 얇은 여름 이불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그랬더니 빨래집게와 운동화 끈 같은 걸로 재주도 좋게 이불을 둘러 씌웠다. 바닥엔 돗자릴 깔고 나무의자도 하나 갖다 놓았다. 그것으로 10살짜리 목수의 솜씨라고 하기엔 꽤나 그럴듯한 천막집 완성!

집 짓기 마무리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박 목수와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애마를 탄 채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 집주인. ⓒ정청라

자기들만의 아지트가 마련되자 아이들은 신이 났다. 가장 먼저 나를 불러 초대 손님으로 앉혀 놓고는 저희들끼리 펄쩍펄쩍 뛰고 뒹굴뒹굴 구르며 신나게 놀았다.

"바람님도 오세요. 구름님도 오세요. 다 오세요."(즉흥곡을 만들어 불러 대는 다랑)

"냐호! 냐호! 냐호!"(뜀뛰기를 하며 소리치는 다나)

"엄마, 근데 집 공사를 너무 열심히 했나 봐. 갑자기 배가 고프네."(지쳐 쓰러지며 다울)

"엄마, 우리 여기서 간식 먹자. 여기서 먹으면 엄청 맛있을 거야."(두 눈을 반짝이며 다랑)

그렇게 해서 천막집에서 간식까지 먹었더니 그게 정말 좋았는가 보다. 다음 날에는 낮 밥도 그 집에서 먹자고 성화이지 뭔가. 하지만 그릇들을 나르고 상을 차리고 하기가 번거로워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날을 잡았다. 큰맘 먹고 야외용 코펠까지 꺼내 놓고 말이다.

"좋아, 오늘은 밖에서 먹자. 대신에 상 차리고 치우는 건 너희가 해야 해. 알았지?"

"알았어! 야호!"

아이들의 약속을 받고선 음식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다시마 한 조각 넣고 고슬고슬 잡곡밥을 지어 김밥! 동치미 무, 당근, 씻어서 양념해서 볶아 낸 무김치 줄거리.... 집에 있는 재료만 가지고 얼렁뚱땅 속을 넣어 만들었다. 또,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나물(쑥, 봄동, 냉이) 된장국이 있기에 거기에 사리면을 넣어 된장 라면도 끓였다.(우리 집에서 라면은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귀한 음식이다. 그러니 라면의 '라'자만 듣고도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대충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특별한 외식을 즐겼다. 새소리를 들으며, 봄바람을 맞으며, 천막 안으로 은은하게 비쳐드는 햇살을 느끼며 말이다. 그러니 밥이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지 않겠나. 값비싼 재료를 가지고 까다롭게 만든 특별한 음식이 아니어도 우린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잠시 머물러 밥을 먹는 집이 엉성한 재료로 어설프게 만든 천막집이라 하여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편안함을 주었듯이 말이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아이들이 날마다 외식하자고 하면 어쩌지?

밥 다 먹고 단감나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이 녀석들, 밥상부터 치우지 못할까! 약속 안 지키면 다음부턴 외식 없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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