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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금치 담그기 대장정[부엌데기 밥상 통신 - 57]

묵은 것보다 새것이 땡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묵나물(고구마 줄기 말린 거)이 있는데 꽁꽁 숨겨져 있으면 안 먹고 지나갈까 봐서 일부러 눈에 잘 띄는 부엌 칠판 앞에 떡 하니 걸어 두었다. 어서 먹어 치워야지 하고 말이다. 헌데 반찬거리가 없으면 새로 나는 나물을 찾아 들로 산으로 쏘다닐망정 묵나물은 외면하게 된다. 마을 할머니들이 첫째 둘째는 본 척 만 척이고 셋째 다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아, 이제 막 돋아나는 것들의 싱싱함이여, 풋풋한 향기여!

김치도 그렇다. 묵은지가 동이 날 때가 되기도 했지만서도 막 담근 김치가 먹고 싶다. 어디 김치거리 할 만한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윗 밭에서 시퍼렇게 쭉쭉 올라온 쪽파를 발견했다. 지난 가을에 뽑지 않고 남겨 둔 게 겨우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시들어 있다가 봄기운에 세력을 회복한 것이다. '아, 김치 담가 먹으면 입맛 확확 돌겠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갔지만 그대로 두었다. 씨 할 것을 빼 먹으면 어쩌냐고 신랑한테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웬걸? 내가 쪽파 얘기를 꺼낸 적도 없는데 신랑이 먼저 말을 했다.

"파김치 담글 거면 쪽파 좀 뽑아 올까요?"

"씨 하려고 남겨 둔 거 아니었어요? 뽑아 온다면야 좋고 말고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신랑이 파를 포대자루로 한가득 뽑아올 줄은! 씨가 모자라면 어쩌냐는 물음에 있는 만큼만 심으면 된다면서 정말 많이도 뽑아 왔다. 그걸 부엌 바닥에 쏟아 부으니 저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허걱! 일 났네, 일 났어! 시들기 전에 다듬어서 김치를 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올 지경, 그런데 신랑이 다울이를 불러와 둘이서 사이좋게 쪽파 다듬기 작업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나는 자동적으로 김치 담그는 건 내 일이라고 여기고 일감 앞에서 겁부터 집어 먹었는데 함께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 같이 먹을 건데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해서 파김치 담그기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다울이는 물론 다랑이까지 가세하여 본격 쪽파 다듬기에 돌입하였는데 한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아롱이 다롱이란 사실을 여실히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먼저 예술가 유형의 장남 박다울, 쪽파 줄기로 매듭을 묶어 뭘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있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는 데 집중하느라 쪽파 잎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아빠한테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도대체 무얼 하려고 앉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반면 다랑이는 완전 실속파 일꾼형, 파 다듬는 재미에 빠져들어 숨소리도 안 내고 파를 깐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재밌는데" 그러면서 말이다. 다울이 덕에 심심치 않고 다랑이는 야무진 일손 역할을 톡톡히 하니 무얼 더 바랄 것인가.

우리집 일꾼 다랑이는 뉘(방아 찧고 난 뒤에도 껍질이 안 벗겨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고르는 게 취미다. 심심하면 뉘를 고른다. 그밖에도 땅콩 껍질까지, 쑥 뜯기 등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좋아서 한다. ⓒ정청라

세 남자가 죽치고 앉아 쪽파를 다듬는 사이 나는 저녁 준비를 했다. 닭장에서 꺼내 온 지 얼마 안 된 싱싱한 달걀에 쪽파를 쫑쫑쫑 듬뿍 썰어 넣고 달걀찜, 거기에다 다듬어 놓은 쪽파 한 다발을 국간장, 매실효소, 고춧가루 넣고 비빈 즉석 파김치 겉절이. 다른 반찬 없이 그것만으로도 함께 일하다가 둘러앉아 먹는 저녁밥은 당연히 꿀맛이었다.

헌데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다듬기 작업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밥 먹고 나니 나른해져서 일감을 쌓아 둔 채 다음 날을 맞이했다. 다행히 바람 불고 추운 날이라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남은 쪽파를 다듬었다. 한 시간 정도 바짝 일했을까?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남은 건 나머지 식구들 몫으로 남겨 두고 나는 저린 다리를 주물러 가며 몸을 일으켜 다시마 우린 물에 찹쌀가루 넣어 죽을 쑤었다. 거기에 고춧가루, 국간장, 매실효소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쪽파 씻어서 건져서 곧바로 양념 넣어 비비고 비비고.... 마침내 커다란 김치통으로 하나 가득 파김치가 만들어졌다. 야호! 그렇게나 많았던 쪽파가 김치통 하나로 끝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이 정도면 대만족!

쪽파 뿌리는 따로 모아 씻어서 볕에 널어 놓고(쪽파 뿌리 말린 것은 아이들 열날 때 끓여 먹이면 좋다), 그 사이 신랑이 뒷정리를 마쳤기에 나는 특별식을 준비했다. 심고 남은 씨감자 손질해서 깍뚝 썰은 거랑 쪽파를 왕창 썰어 넣고 자장소스를 끓여서 쪽파 자장밥! 거기에다 막 버무린 파김치를 곁들이니 온몸이 쪽파 향기로 휩싸이는 듯했다.

파금치 담근 걸 기념하여 쪽파자장밥 특식. 꽃은 장식용이자 식용이다. ⓒ정청라

"다울이 다랑이 덕에 파김치 먹네. 이건 그냥 김치가 아니고 금치다 금치!"

일꾼들의 수고를 치하하자 아이들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면서 매운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김치를 어찌나 잘들 먹는지... 누가 보면 깜짝 놀라하며 무슨 애들이 파김치를 이렇게 잘 먹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묻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자신의 손끝을 스쳐간 파라서 매워도 맛있을 수밖에 없지요. '파김치 나와라 뚝딱!' 요술을 부려서 태어난 파김치라면 이렇게 귀한 대접은 못 받았을 거예요. 맛을 알게 하고 싶으면 함께 경험하게 하세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힘겹고 지루한 과정을 몸소 겪으며 통과했을 때 진짜 맛을 알게 되는 거랍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 삶의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 아닐까?! 파김치를 파금치로 만드는 삶의 연금술은 지금 여기 삶의 현장(일상)에서 연마되어야 한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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