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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부엌데기 밥상 통신 - 54]

징그럽게도 추운 겨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면 모든 게 꽁꽁 얼어 버린 얼음 세상이 따로 없었으니까. 한번은 마시던 물컵을 부엌 식탁 위에 올려 놓았는데 30분쯤 지난 뒤에 나가 보니 어느새 얼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온도계가 없어서 정확한 온도를 재 보지는 못했지만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생선이나 부엌에 서 있는 나나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울 땐 사람도 겨울잠을 잔다면 얼마나 좋을까? 밥을 한꺼번에 든든히 먹고 몇 날 며칠 잠만 자다가 날이 풀려서 움직일 만하면 그때 일어나 활동을 하는 거다. 물론 내가 자는 동안 누군가 아침 저녁으로 방에 불을 때 준다는 가정 하에서만 펼 수 있는 행복한 상상, 아니 망상이지만, 이런 망상 속에 빠지고 싶을 정도로 나는 너무 움직이기 싫었다.

하지만 현실은? 눈만 뜨면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세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는 곧 큰 소란이 벌어질 게 뻔하다. (배고픈 아이들은 굶주린 사자 못지 않게 사납다!) 그러니 어쩌랴. 소란이 일어나 누군가 울부짖기 전에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애써 몸을 일으켜 갑옷과도 같은 솜조끼를 입고 비장한 각오로 부엌 냉동실로 뛰어드는 수밖에.

날이 조금 풀리자 아이들은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간다. 셋이 힘을 모아 나무로 자동차 만들기! 이러고 노니까 늘 배가 고프지. (사진 제공 = 정청라)

처음 몸을 일으키기까지가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몸이 자동으로 ‘먹여 살리기 모드’로 작용하여 민첩하게 움직인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냄비에 고구마를 앉히거나 달걀을 삶거나 누룽지를 하거나 해서 방으로 들인다. 그렇게 해서 간단한 아침으로 아이들의 허기를 잠재우면 마침내 평화가 온다.

하지만 평화의 순간은 배가 꺼지지 않은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의 배가 다 꺼지기 전에 나는 아주 잠깐 동안만 숨을 고르고 이번에는 낮밥 준비에 들어간다. 낮밥 먹고 나면 또 잠깐의 휴식이 있지만 아이들은 뒤돌아서면 배가 꺼진다는 사실을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만족스럽게 배가 채워져야 놀이도 활발하다는 지난 수년 동안의 육아 경험을 토대로 간식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법, 나는 어느새 간식 준비로 바빠진다.

그러고 보니 그 추웠던 날들 동안에도 참 많은 걸 해 먹었다. 만두, 볶은 땅콩, 피자, 호떡, 팬케이크, 납작빵, 부침개, 인절미, 시루떡, 강정, 쥐이빨옥수수 팝콘, 또띠아, 단팥죽, 수제 두유.... 이렇게 줄줄이 늘어놓고 보니 지난 겨울이 길고 길었던 만큼 우리가 먹었던 간식의 목록 또한 참 풍성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겨울엔 먹고 노는 게 일일 뿐더러 내 몸 하나 부지런히 놀리면 아이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게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해 먹였다. 그러는 와중에 난 호떡의 달인이 되었고, 청국장을 넣어 만든 독특한 피자 소스를 개발하게 되었으며 찹쌀가루도 없이 찰밥 지어 얼렁뚱땅 인절미 만들기, 막걸리 효모를 이용해 각종 빵 만들기 등에도 식견을 갖게 되었다.

오도독오도독 강정. (사진 제공 = 정청라)

물론 늘 의도한 대로 먹기 좋고 보기 좋은 결과물이 나왔던 것만은 아니다. 참깨 강정에 처음 도전했던 날은 설탕 시럽과 조청의 비율이 잘못되었는지 강정이 굳어지지 않았고, 콩비지를 욕심껏 듬뿍 넣어 만든 부침개는 모양이 어그러져 개떡처럼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패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 주었기 때문이다.

“엄마, 여기에 뭐 넣었어? 왜 이렇게 맛있지?”

“와, 엄마 나중에 장사해도 되겠다. 정말 훌륭해.”

“또 있어? 너무 맛있어서 자꾸자꾸 또 먹고 싶네. 내일 또 해줘.”

아직 말을 잘 못하는 다나 같은 경우에도 온몸으로 춤을 추거나 나를 와락 껴안는 것으로 자신의 행복감을 강력하게 표현했다.

내가 만든 음식이 너무 훌륭해서? ‘물론이지!’ 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 우리 집 아이들의 경우엔(특히 다랑이와 다나) 못 먹는 게 없다. 바람든 무나 생강차 건더기까지 맛있게 먹는 걸 보며 애들은 뭘 던져 줘도 맛있게 먹을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음식 솜씨가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들의 먹는 솜씨가 아주 특별했던 것이다. 그러니 옆집 할머니가 늘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씀하시고는 한다.

“집이는 좋겄네. 아그들이 뭣이든 맛나게 먹응께. 우리는 뭘 해놔도 굴어지들(줄어들지를) 안 혀. 그라니께 하기가 싫어.”

이쯤 되니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내가 이 아이들을 먹여 살려 왔다고 믿었는데 과연 그런가? 실상은 이 아이들이 나를 먹여 살렸던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다. 막강추위에도 내가 굶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은 아이들이 나를 일으켜 세워 준 덕분임이 틀림없다.

청국장 소스 피자. (사진 제공 = 정청라)
가래떡 구이. (사진 제공 =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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