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5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 담당 기자님 전화가 왔다. 번번이 원고 마감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은 터라 '뭐야, 벌써 마감일이 지났나?' 싶어 심장이 덜컹, 서둘러 달력에 눈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저 여쭈어볼 게 있는데요, 그 들기름 짜는 기계 말이에요...."

기자님의 용건은 다행히도 마감 독촉은 아니었다. 내가 6개월쯤 전에 <지금여기>에 들기름 짜는 기계가 등장하는 내용의 원고를 썼는데, 그와 관련해서 아직까지 독자들의 문의가 많다는 거였다. 어디서 샀는지, 값은 얼마인지, 들기름을 짤 때 들깨를 생으로 넣는지 볶아서 넣는지, 정말 쓸 만한지.... 글이 올라가고 나서 조회수가 대단했거니와 그후 얼마간은 물론이고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지금여기>에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그와 같은 내용을 묻는 독자가 있단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 얼떨떨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손수 기름을 짜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 뭐지? 내 글이 상품 홍보에 일조한 것인가?

그러고 보면 글이란 게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 같다. 졸지에 내가 기름 짜는 기계 홍보대사의 지위에 올라가 있으니...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밝힌다. 나는 기름 짜는 기계 제조사로부터 청탁을 받은 일이 없다. 

기자님의 질문 가운데 가장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던 질문은 그 기계가 정말 쓸 만한지 어떤지에 관한 것이었다.

"네, 저희는 잘 쓰고 있기는 한데요, 그렇다고 이게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부품 청소하는 것도 번거롭고, 기름 짤 때 힘도 들고.... 저희 신랑이나 되니까 놀이 삼아 기름을 짜는데 그게 좀...."

그렇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강력 추천! 누구나 손쉽게 기름을 짤 수 있다!'라고는 말을 못 하겠다. 요즘엔 들기름 사 먹을 데가 널리고 널리지 않았는가. 방앗간에 들깨를 맡기면 순식간에 뚝딱 기름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손수 짜 먹고 싶다는 건 좀더 신선하고 믿을 수 있는 기름을 먹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일 텐데 그렇다고 덜컥 기계를 들여 놓았다간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이다. (어쩌면 나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 마이 갓!) 그러니 일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다음 다섯 가지 항목에 답함으로써 자기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다.

* 도끼질이나 톱질을 할 때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 작은 부품의 조립과 청소, 기름때 제거에 많은 관심이 있다.

* 억세고 질기고 거칠거칠한 음식을 좋아한다.

* 개미와의 동거(또는 공생)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 평소 바보 같고 미련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만약 위 다섯 가지 항목에 모두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기계를 사도 좋다. 들기름을 집에서 손수 짜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찌 보면 삶의 방향성이나 태도와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그게 그렇지가 않다. 고생을 고생스러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고, 자질구레한 일거리들을 놀이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기름 냄새를 맡고 꼬여 드는 개미떼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기름 짜고 나온 찌꺼기인 깻묵마저도 요리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효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스마트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쓸데없는 짓, 못할 짓, 바보 짓이 따로없을 것이다.

우리 신랑을 한 예로 들겠다. 평소 전기톱 없이 톱과 도끼만 가지고 장작을 마련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저마다 "전기톱 얼마 안 해. 전자톱 사서 써!"라고 말하지만 "네" 하고 대꾸할 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막강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날,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톱으로 나무를 써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 정도가 되니까 기름을 짜 먹지!' 싶었던 거다. 그뿐인가. 지난주에 이틀 동안 조청 작업에 몰두하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도 힘들다 한마디 없었다. 이틀을 다 바쳐서 고작 3킬로그램 남짓하는 양의 조청을 얻었는데도 좌절하는 기색 또한 없었다. 그냥 하는 거다. 아이들이 왜 놀아야 하는지, 어떻게 노는 게 경제적인지, 놀이의 효용성은 무엇인지 따위의 고려 없이 그저 놀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놀 듯이 말이다. 어찌 보면 참 어마어마한 경지인데, 그 정도 경지는 되어야 기름 짜는 기계의 값어치를 구현해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기계를 장난감 삼아 좌충우돌 실험하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는 사람이라야 말이다.

내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공연히 원망을 듣는 일을 막기 위해 최대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와 더불어 내가 들기름을 손수 짜 먹게 되면서부터 들기름을 금기름처럼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싶다. 농사짓고 살면서 비로소 고구마 하나, 참깨 한 주먹 귀한 걸 알게 되었듯이 기름 짜 먹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름 한 방울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과정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땀방울을... 그래서 음식에 들기름을 넣을 때면 손이 덜덜 떨린다. 어쩌다 주르륵 넘치게 흘러내리면 '아차' 싶어서 등줄기에 땀이 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더 궁색한 형편이 된 건지도 모르지만 그 덕분에 들기름 한 방울의 위력을 더 크게 실감하며 살게 되었다.

오늘도 들기름 한 방울 넣은 간장에 김을 찍어 먹으며 슬그머니 웃음을 짓는다.

금빛 찬란한 우리집 생들기름 되겠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기름을 새로 짜서 먹으니 신선도야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엄청난 공이 든다는 거, 잊지 마세요. ⓒ정청라


덤. 기름 짜는 기계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한 FAQ

1, 어디서 살 수 있나요? 값은?

구글 사이트에서 'oil press'라고 검색해 보시면 다양한 제품이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저희는 PITEBA 홈페이지(www.piteba.com)를 통해 19만 원 정도 주고 샀습니다.

2. 들기름 짤 때 들깨를 볶아야 하나요?

취향에 따라 볶아 넣어도 되고 생으로 넣어도 됩니다. 저희 집에서는 생으로 넣어 생들기름으로 먹고 있습니다. 들깨뿐만 아니라 참깨, 산초열매 씨앗, 달맞이꽃 씨앗, 땅콩 등을 넣고 다양한 종류의 기름 짜기를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재료에 따라 볶아야 기름이 잘 나오는 것과 안 볶아도 크게 지장이 없는 것이 있겠지요? 다양한 실험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예열 도구는 무엇으로 하나요?

기계를 제조한 회사에서는 알코올 램프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저희 집에서는 안 쓰는 기름을 활용한 등잔 같은 형식의 불을 쓰고 있습니다.(기름이 담긴 유리병에 두꺼운 줄을 심지로 삼아 끼워서 사용) 알코올 램프에 비해 화력이 떨어지는 관계로 기름을 짜기 위해 손잡이를 돌릴 때 겁나 힘이 듭니다.

4. 손쉽게 청소하는 방법이 있나요?

없습니다. 부품을 분해하여 끓는 물에 삶아서 작은 솔로 꼼꼼히 닦고 물기를 잘 말려서 보관해야 합니다. 기계 본체에 묻은 기름기와 그을음도 청소해 주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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