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훈 신부의 바깥 일기]

교구가 관할하는 서해의 섬들은 많다. 쾌속선이 생기고선 예전처럼 낙도란 말이 무색하지만 그곳에 부임하는 사제들에겐 여전히 낙도다. 뭍에 나오는 일이 큰일이고, 돌아가는 길이면 몇 안 되는 본당 꼬마들을 위해 피자나 햄버거 같은 도시의 냄새를 한 가방 챙겨 가야 한다. 드물게 본당이 신설되긴 해도 과거의 복작거리던 공동체는 기대하기 힘들다. 모두 도시로 뭍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섬 가운데 덕적도는 아직도 거리로나 마음으로나 멀고 먼 진짜 섬이다. 지금은 폐허뿐이지만 이 낙도에도 한때 큰 병원이 있었다. 덕적도란 이름과 나란히 선배 신부들의 입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던 이름, 미국 메리놀회 소속 선교사 최분도 신부(Benedict Zweber, 1932-2001)의 흔적이다.

서른도 안 된 앳된 사제로 부임해 14년간 그곳에서만 일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모든 것이 낙후한 섬이니 그 생활이 오죽했을까. 막막하기도 했겠지만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신부에겐 ‘수확할 것이 많은 밭’이었을 게다. 처음 그가 마음을 둔 곳은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는 섬 주민들을 위한 의료사업이었다. 급한 대로 어선을 개조해 인근 섬을 오가는 병원선을 마련하고 본국의 부유한 부모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세웠다. 뭍에서도 보기 힘든 첨단의료기기와 약품들이 가득했고 세분화된 진료과에 병상까지 60개였다니 이런 진풍경이 또 있었을까. 이뿐만 아니다. 밤이면 까마득한 어둠에 잠기던 섬에 100kw 발전기 두 대를 들여와 전기선을 깔았다. 처음 전기불이 들어오던 날은 주민의 증언대로 그야말로 ‘광명의 날’이었다. 

전후이기도 했지만 어업에 기대 사는 섬은 더 헐벗었다. 일정한 수입원 없이는 저 지긋한 가난을 벗을 수 없는 터였다.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섬 일대가 김 양식에 적합한 환경이란 사실을 확인하곤 양식업을 성공시켰다. 기술은 인근 섬에도 보급되어 질 좋은 서해 북부 김을 탄생시켰다. 젊은 선교사는 지치지도 않았다. 해변에 밀려오는 모래 더미로 큰 비만 오면 고질적으로 침수되던 섬에 대대적인 하천공사를 벌였고 너른 담수지와 제방을 쌓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파란 눈의 신부를 섬사람들은 업고라도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약에, 밥에. 빛까지 전해 준 둘도 없는 은인. 서포리 해수욕장 노송 언덕에 지금도 서 있는 그의 공덕비는 그가 선교사 이상의 존재, 그 자체로 섬의 역사였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1만 명 남짓한 당시 섬사람 중 7000명이 천주교 신자였다니 섬 전체를 선교한 셈이다.

1만 명에 7000명, 엄청난 숫자이고 분명 대단한 선교사다. 통상 관할구역 인구의 10분의 일이 신자이고 게 중 30퍼센트 정도만 실제 신자생활을 하는 요즘의 현실로는 아예 엄두도 못 낼 숫자 아닌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당시로선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다. 추호도 선배 사제의 노고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주린 배에 빵을, 아픔에 약을, 어둠에 빛을 주는 교회는 그들에게 그야말로 목숨 같은, 아니 목숨 자체였을 것이다. 염치가 있다면 보은의 심정으로라도 성당에 나갔으리라. 이를 단순히 흔히 말하는 ‘밀가루 신앙’이라 깎아내릴 수 있을까? 적어도 그들에게 교회는 오늘의 교회보다 실재감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흡사 그것은 과거 중세의 성당처럼 큰비만 올라치면 휩쓸려 가는 남루한 집들을 뒤로하고 깃들던, 언제나 거뜬히 서 있는 마을 유일의 ‘돌로 지은 집’, 항상 넉넉한 ‘아버지의 집’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어쨌든 저 엄청난 업적은 사실 필요한 것을 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교회라 가능했던 것이다.

덕적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의 교회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약도 밥도 빛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세상, 풍족해졌고 더는 구호물자로 연명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누구말대로 빵을 대신할 것이 찢기고 터지는 저 생존의 전장에서 잠시 숨을 돌려 다시 나가 싸울 힘을 얻는 ‘마음의 평화’일까. 잠시라도 세상 풍파를 잊게 할 진공의 공간, 탈속의 고요일까. 그런 것이라면 그 얼마나 참담한 교회인가. 분명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환경이지만 사실 막막한 것은 황무지에서 맨손으로 일하던 저 벽안의 선교사보다 오늘의 사목자들의 심정이 아닐까. 뭐든 내줄 만큼 교회는 넉넉해졌지만 더는 그런 걸 얻으려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 세상, 가난을 구하려다 제 스스로를 영영 가난으로부터 구제해 버린 교회, 숭고한 사업을 이어가려다 숭고한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 이 막막함, 이 까마득함은 분명 어둔 바다를 바라보던 저 이역의 선교사가 아니라 정녕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사목자들의 것이겠다.

전설 같은 선교사의 섬에서의 마지막 시간도 눈길을 끈다. 나름의 성취감과 중년의 완숙함까지 갖춰 어떤 일이든 자신 있게 도모해도 좋은 때에 장상은 그를 돌연 뭍으로 불러들였다. 책상 위에는 이제 곧 첫 삽을 뜰 섬 전체의 지도를 바꿀 간척사업을 위한 설계도가 놓여 있었다.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도 대단하지만 하필 그 순간 그를 뭍으로 불러들인 교구장의 속내를 헤아리게 되는 장면이다. 장상은 어쩌면 그가 섬 주민들에게 선물했던 밥과 약과 빛은 사실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은 도구요 과정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무릇 사목자란 사람들 사이에,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늘의 교회가 느끼는 저 막막함은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밥과 약과 빛으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사목자의 숙명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밥과 약과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밥과 약과 빛으로 사는 것, 이를 분간하고 식별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청춘을 오롯이 바친 섬을 떠나는 선교사의 가방은 분명 단출했을 것이다. 밥과 약과 빛이 아니라 그가 챙긴 것은 밥과 약과 빛으로 살려는 마음이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야속한 장상이 한없이 고마운 대목이다.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중1동 성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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