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훈 신부의 바깥 일기]

팔불출 같은 이야기지만 본당의 첫날은 편치 않았다. 굳이 데리러 오겠다던 본당 신자들. 전 임지 동료들의 전송을 받으며 올라탄 승용차. 침묵이 이어지다 동승한 신자가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새 신부가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많이들 걱정한다는 것이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 중 ‘정치 신부’란 단어가 제일 거슬렸단다. 뭐라 답할까. 머쓱한 웃음으로 걱정 마시라 했다. 내 차를 몰고 갈 걸 하고 잠시 후회했다. 걱정하는 그들을 나 역시 걱정했다.

본당은 우려와 달리 따듯했다. 20년 전에나 유행하던 성미함을 매주 가득 채워 줬고 성모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꽃 대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함에 마음을 모아 줬다. 청년들은 세월호 3주기 미사를 꾸려 어른 신자들을 초대했다.

‘매일미사’ 정형화된 기도 말고 ‘우리’의 기도를 하자는 제안에도 답해 줬다. 취업으로 허덕이는 본당 청년들이 기도문에 등장했고 오랜 병간호에 자신마저 병을 얻은 어머니의 기구함에 같이 눈물 흘렸다. 기도는 시리아 난민에 무관심했음을 부끄러워했고 실직자들의 고단한 삶을 걱정했다.

서너 줄이지만 매주 끙끙대야 만들어졌고 간혹 폭탄 같은 문장도 끼어 있었지만 어엿한 ‘우리의 기도’였다. 잠시라도 우린 좁은 울타리 너머 저 밖의 고통들에 가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기만 하면 그대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겁이 나기도 했다. 내 생각이 항상 옳을 순 없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마음이라도 모두에게 좋을 거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본당은 여전히 완고하기도 했다.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변화가 거북하고 불편하단 소리도 들려왔다. 더러는 나를 완곡하게 만류하기도 했다. 현장 미사에 다녀온 다음날은 어딘지 모르게 술렁였고, 어느새 밖으로 나갈 때면 제의를 챙겨 주는 제의방 봉사자들은 스스로 입단속들을 했다. 고마웠지만 서글펐다.

고해실을 나올 때면 유독 마음이 무거웠다. 그 무거움이 무수히 생채기 난 평범한 일상들을 어찌 마주할지 모르는 엉거주춤한 나를 만나야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 가깝고도 흔한 가난을 두고 나는 혹여 저 밖의 가난만을 가난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저 밖과 이 안의 가난을 나누고, 나는 계몽하고 그들은 계몽되는 역할극은 아닐까 두려웠다. 밖의 가난이나 고해실 안의 가난이나 모두 날것의 가난인데 말이다. 둘 다 아프고 딱하고 가혹한데 말이다.

여름 끝자락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정리해고, 위장폐업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후 근 8년을 ‘선도투쟁’ 일원으로 농성 현장을 꼬박 지켰던 이다. 노모의 깊어진 병과 당장의 생계가 그를 고향으로 소환했다. 집 근처 포도밭을 밭떼기로 얻어 농사를 지어 왔다. 판로를 찾는 전화였다. 밭째 넘기는 농협 수매가와 그가 정한 판매가를 비교해 가며 설명하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다급했다. 매해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본당을 맡은 올해는 조금 수월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혼자 결정할 순 없어 신자들에게 정황을 설명할 짤막한 글을 써 내려 갔다. “해고 노동자....” 글이 멈췄다. 미사 후 나눠 준 세월호 리본이나 강론 중 언급되는 노동자란 단어에도 불편해 하던 신자들에게 이 한 단어를 설명하긴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간단하지만 간단치 않고, 흔하지만 아득해져 버린 단어, 누구에겐 애틋하지만 또 다른 누구에겐 거북스러울 낱말. 글은 결국 장황해졌다.

가난이 만나는 가난은 그러나 항상 감동이다. 신자들은 공장이 아닌 포도밭 위에 떨구는 노동자의 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가혹한 운명에도 아직도 정직한 땀을 신뢰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던 것일까. 포도는 금세 동이 났다. 이것밖에 도울 게 없다며 미안해 했고 자두가 포도보다 더 이문이 남아 포도는 이제 그만 지을 생각이라는 말에 아쉬워 했다. 추석은 쇠어야 하지 않느냐며 다른 동료들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며 후원금을 쥐어 줬다.

그렇게 가난이 가난을 걱정했다. 가난이 만나는 가난, 가난을 싸매 주는 가난, 가난이 안아 주는 가난. 안과 밖으로, 계몽하고 계몽되어지는 부질없던 나의 가난도, ‘좌와 우’의 그들의 완고한 가난도 이 아름다운 가난 앞에 부끄럽다.

어설픈 농부가 떠난 후 본당에서의 첫 축일을 지냈다. 마다하고 강권하고, 축하식을 둘러싸고 곡절이 많았다. 또 이번에도 나만 고고하고 혼자 가난했던 것은 아닐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자 하나가 연필로 꼭꼭 눌러 써 준 편지 속의 나는 ‘가난에 마음을 빼앗겼고’, 아직도 ‘여기엔 없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유난을 떨며 산 거로구나. 그런 나를 내내 지켜봤을 신자들. 그들에게 또 미안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가난이 만나는 가난을 나는 생각한다. 거기서 새롭게 만날 빛나고 아름다운 가난을 생각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자 하나가 연필로 꼭꼭 눌러 써 준 편지 속의 나는 ‘가난에 마음을 빼앗겼고’, 아직도 ‘여기엔 없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사진 제공 = 장동훈)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중1동 성당 주임
인천교회사연구소 소장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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