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훈 신부의 바깥 일기]

일 년 만에 찾은 제주 강정. 본당 사목실습을 온 부제가 아니라면 또 언제 찾았을지 모를 일이다. 현장에 함께 가 보고 싶다는 말에 선택한 곳이지만 대뜸 의아한 표정이다. 해군기지가 들어선 곳, 이미 결판난 싸움터니 ‘현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갸우뚱한 그에게 왜 그곳이 여전히 현장인지 바로 설명할 수 없었다.

십 년 남짓의 강정 싸움에 아예 그곳 주민이 되어 버린 노사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마디마다 언제든 현장을 지켰던 강철 같은 사람, 그런 그가 간혹 외롭고 힘겹다는 문자를 보내 왔었다. 가끔 타전되는 소식은 강정에 남은 그를 까맣게 잊고 지낸 것을 한없이 미안하게 했다. 도대체 그는 왜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일까.

마을엔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아니 떠나길 그만둔 이들이 여전하지만 얼마 전까지 들끓던 생기는 사라지고 없다. 외부인과 현지인을 구분짓던 경계도 더는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된 삶과는 다른, 차라리 전쟁을 일상으로 품어 버린 정착민들의 삶이랄까. 싸움이 끝났지만 여전히 전장을 떠나지 못하는 시대착오가 아닌 어떤, 내면화되고 일상화된 싸움 같았다. 늙은 그도 예외는 아니겠다.

섬 바람 배인 햇빛에 귓바퀴마저 남김 없이 태워 버린 그는 더 늙어 있었다. 최근의 일부터, 몇 해 전 일까지 기억을 더듬을 때면 상대가 맥락을 이해하는지 거듭 살폈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기억은 집요했지만 아득했고 그래서 슬펐다. 그의 말버릇처럼 그곳이 정말 그의 마지막 체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도대체 그는 왜 여길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멀리서만 바라보던 현대사의 인물을 코앞에서 대면하는 부제를 배려한 때문일까. 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부터 강정에 이르기까지 자진해 그의 인생을 약술했다. 친절하진 않았다. 때론 호통치고 때론 눈물 흘렸다. 최근의 일을 회고할 땐 서운함마저 역력했다. 해군기지 완공 후 제주교구의 천막 미사 중단 결정과 다시 재개한 외로운 미사, 뜸해진 후배 사제들의 방문, 메울 길 없는 마을 공동체의 상처까지 그 복잡한 속내를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 그날의 그는 강정에 정착하기 전까지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모든 것에서 선명했고, 그래서 잘 벼린 칼날 같은 이가 아니었다. 여전히 분노했지만 판단을 유보했고 선명했지만 다시 헤아렸다. 늘 가장 선두에서 현장을 지켰지만 결국 왔던 곳으로 떠나던 그가 아닌, 이참에 아예 눌러앉아 그곳에 녹아 내리길 결심한 사람 같았다.

▲ 2012년, 문정현 신부. (지금여기 자료사진)

몇 해 전 명동 성당 마당에서 일 년을 보내고 나서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해 단식기도를 하던 사제들을 향한 성당의 홀대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그는 나무판 위에 말씀을 새기며 일 년을 성당 마당에서 보냈더랬다. 일종의 농성이었다. 천막 기도소를 쇠지레까지 동원해 철거했고, 성당 들머리에서 비닐 한 장 없이 잠을 자던 사제들에게 수돗물을 뿌렸다. 이럴 거면 신부 옷을 벗고 하라는 신자들의 조롱과 멸시, 멱살잡이까지 당해야 했던 곳이다. 이글거리던 분노로 그가 처음 나무판 위에 새기기 위해 골라 든 말씀들은 죄다 심판과 저주, 날선 것들이었단다. 날수가 더해 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구절들이 달라졌단다. 나중에는 현실 교회의 민낯과 완고함을 향해 분노로 힘주어 새겼던 그 말들의 수신인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더란다. 비록 그가 성당 마당에서 그렇게 일 년을 버티며 종국에 만났던 것이 제도로서의 교회는 아니었겠지만 자신이 떠날 수 없는 ‘교회’였음에는 분명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본당은 내게 불시착 같았다. 잘못 떨구어진 곳처럼 답답했고 언젠가는 떠날 곳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였겠지만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을 동반해야 하고 편협하고 완고한 마음들을 만날 때면 더 그랬다. 본당이라는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한심하다가도 나 역시 거기에 함몰되고 있단 사실에 소스라쳤다. 문제는 비판 속에 항상 나는 그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이었다. 참다운 선교사는 무릇 소유하거나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무용하게 만들고 항상 떠나는 존재라지만 그 이전에 나도 그 일부이고 여기 사람이라는 신원마저 없었던 것이다. 거듭 부끄러운 고백이다.

선교사는 항상 떠나는 존재지만 또 항상 그 자리에 뿌리내린 사람이기도 하다. 대단할 것 없는 일상들, 보잘것없는 삶, 편협하고 이기적인 곳에 그 일부로 녹아들어야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언제든 떠나는, 울타리 밖 저 너머의 고통들을 주시하길 멈추지 않는 존재일 테다. 성전 환전대를 뒤엎는 열정에도 추수 끝난 들판의 낱알들을 제자들과 까먹던 구차한 일상을 짊어진, 견디면서도 전진하길 멈추지 않은 그 옛날의 스승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구체와 전망, 현실과 이상, 진지전과 전면전을 하나의 가슴에 품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추하고 못난 것마저 사랑하기란, 그리고 그 안의 일부인 나를 인정하기란 또 얼마나 더 힘든 일이겠는가. 늙은 그가 무디어졌다지만 여전히 굵고 선명한 까닭은 이 어려운 사랑에 더 다가간 때문이겠다. 그곳이 아직도 현장인 이유 역시 그가, 또 그들이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때문이겠다.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중1동 성당 주임
인천교회사연구소 소장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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