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대화-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파람북, 2021

안에서 낯선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 밖에서 읽어낸 것들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거나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듯한 상실, 또는 박탈감이 따라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의 경계가 뚜렷할수록 더욱 그렇다.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소외가 숨 쉬는 공기 곳곳에 퍼져 있는 것 같은 시대. 대화와 소통은 끊임없이 요청되지만 그마저 철저한 불통의 증거일 뿐이다. 우리는 왜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책 “끝낼 수 없는 대화”를 쓴 장동훈 신부(인천교회사연구소장)는 때로는 교회와 교회 밖의 극심한 온도 차를, 때로는 안과 밖에 드리운 같은 그림자를 체감하며, 교회와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분도’지(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에 연재해 왔다. 이 책에는 그중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사람과 교회, 세상에 대해 사유하고 대화한 흔적들을 담았다.

어릴 적 “미술 시간에만 눈이 반짝였”고, 화가를 꿈꿨다는 그는 오래 바라본 그림들을 통해 세상과 자신과 교회와 사람들 사이의 통로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들어 함께 말할 수 있는 ‘광장’을 만들고자 한 것 같다. 또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에 대한 연민은 부디 교회의 높은 울타리가 세상 밖에 더 짙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기를 바라는 성찰과 바람이 된다.

'나와 당신의 세상', '어둡고도 빛나는', '종교 너머의 예수', '혼미한 빛' 네 장의 구성으로 된 이 책은 에드워드 호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오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프란치스코 고야 등 15명의 작가와 그림들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살아간 세상, 그것들과 벽을 쌓기도, 허물기도, 조우하기도 했던 교회, 그리고 오늘 인간의 삶과 교회의 자리를 들여다보며, 이 모든 것의 내일에 조명을 비춘다.

어쩌면 “교회 안”의 사람인 사제지만, 저자의 대화 상대가 된 그림들은 종교화가 아닌 ‘세속화’다.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고 당연한 문화였던 시기를 지나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된 뒤 두드러진 ‘세속화’는 내용은 물론, 생겨나고 유지된 과정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여러 맥락과 사유를 다양한 결로 드러낸다. 

"끝낼 수 없는 대화-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파람북, 2021. (표지 제공 = 파람북)
"끝낼 수 없는 대화-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파람북, 2021. (표지 제공 = 파람북)

장동훈 신부는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야말로 참으로 거룩한 것이고, 세상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최종 고백을 언급하는데, 바로 이것이 “끝낼 수 없는 대화”의 맥락이자 골자다.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하자 교회 역시 당황했다. 가라앉는 세상에 대한 집착인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인류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연일 단죄의 말을 쏟아냈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되길 원했다. 교황 비오9세의 ‘오류목록’처럼 새로운 것들, 새로운 세상은 모두 ‘오류’일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지켜보고서야 교회는 이 인류와 동행하길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런 결심의 표현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37쪽)

오래 그림을 들여다본 교회사학자가 쓴 각 장의 흐름은 다양한 질감과 색깔의 실로 흥미롭게 직조된다.  동시에 각 장의 마디 마디에서 읽는 이의 내면에 자리 잡는 새로운 질문은 반갑다.

그는 마사초의 작품 ‘낙원에서의 추방’을 2011년 부산 영도 조선소 크레인 위의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연결하고, 유학 뒤 첫 소임이었던 사회적 약자와 만나는 활동을, 인간다움에서 ‘추방’된 이들을 길어 올린다.

미국 사실주의를 이끌었던 작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에서 느껴진 불쾌함과 불길함은 1900년대 초중반 경제 대공황과 세계대전, 산업혁명 등 비인간화 시대의 도래와 맞물리며 이를 남다른 깊이로 통찰한 동시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를 소환한다.  

또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1868-1907)의 작품 ‘제4계급’에서는 노동 문제와 교회 최초의 노동 관련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1891), 세속에 대한 교회의 변화된 태도를 이야기한다.

민중미술 작가 홍성담(1955-), 오윤(1946-86)의 작품에 이르러서는 “몸이 있는”, “몸이 된 말” 그리고 1980년대 한국사회의 폭앞적 현실 앞에 오랜 침묵을 깬 교회의 목소리를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책 제목 “끝낼 수 없는 대화”는 교회와 세상의 대화이며, 이 대화는 애초에 끝마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제4계급',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 (1901) (이미지 출처 = 밀라노 노베첸토 박물관)<br>
'제4계급',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 (1901) (이미지 출처 = 밀라노 노베첸토 박물관)

책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저자가 교회가 세상과 나눠야 할 대화에 대해 각별했던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장동훈 신부는 그 옛날 일상이 종교,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었던 낯선 사실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누구라도 깃들 수 있는 공유지로서 실재감 가득한 교회는 이제 없다고 말한다.

그 옛날 일상이 종교,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에 잘 녹아들었던 시간은 '낯선' 사실이 되었고, 안타깝게도 이제는 누구라도 언제나 깃들 수 있는 공유지로서 실재감 가득한 교회는 이제 없다고도 토로하며, "그렇다면 평범한 삶의 당연한 전제가 아닌 교회가 세상을 향해 건넬 수 있고, 건네야 할 말은 현실로 끌어 내린 말”이라고 말한다.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자주 멈칫거리게 되는 순간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같은 추상적 낱말을 마주칠 때다.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남의 것 같아서다. 추상어이니 누구에게도 거슬릴 일 없고, 그래서 ‘대중적’이지만 동시에 무력한 말일 가능성이 크다. 불행스럽게도 이런 유의 말들은 의례 '설교대‘에서나 사용되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으로 현실에 내린 뿌리가 없으니 뜻없는 말이기도 하다. 듣기는 좋으나 현실에 맥 못 추는 쓸모없는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형식이라도 내용을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 그만큼의 삶, 그만큼의 진심이 ’말‘을 실로 생동하게 하는 것이다. 저 멀리 늙은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여기 있다.”(208쪽)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말, 아무도 시비 걸 수 없는 말은 말이 아니며, 대화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교회 울타리 밖의 하느님 백성들이 듣고자 하는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재하는 삶의 터전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정의와 평화, 사랑의 몸짓이다.

최근 몇 년처럼 교회와 세상 간의 ‘대화’가 절실했던 적은 없다. 생명, 성, 인권 등 특히 가톨릭교회 교리와 충돌하는 여러 이슈가 분명히 드러나고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면서 늘 아쉬웠던 것은 찬반이나 수용 여부가 아니라 ‘대화’였다.

하지만 교회는 오래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재차 확인하고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는 있었지만,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고 그것이 안타까웠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은 당신이 구태의연하다는 비난, 기존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새로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요청이고, 교회가 세상을 더 섬세하고 긴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의무를 각성시키는 매일의 화두가 아닐까.

최초이자 최고의 교리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또 함께 말하고 듣는, 함께 만드는 ‘우리의’ 교회가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자, 오늘 ‘시노달리타스’를 말하는 우리의 길이라 생각하며, 이 역시 우리 안에서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대화는 끝낼 수도 없고 끝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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