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월 14일(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하느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성소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경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위한 길을 만들고, 제자들에게 그가 준비한 길의 주인공을 따르라고 초대한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그룹에서 나온다.(요한 1,35-3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1,36)으로 알아본다. 탈출기의 구조가 요한 복음의 이 부분에 뚜렷이 보이는데, 죽음을 통한 해방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어린양의 이미지는 이 주제를 표현하지만, 또한 요한은 묵시록에서 보이듯이 승리하는 양의 모습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두 제자들은 어려움들과 그들의 선택에 따르는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를 받는다.(1,3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는다: “무엇을 찾느냐?”(1,38) 이 질문은 방금 도착한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자질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묻는 질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라삐”(스승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라고 부르고 묻는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삶을 나누고 싶은 갈망을 표현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대답도 매우 구체적이다: “와서 보아라.”(1,39) 모든 것이 직접 체험의 수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이야기를 감동 있게 전달하는 요한 복음사가는 그가 예수님과 직접 만났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1,39) 우리의 삶에서 잊지 못할 사건들은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억하도록 하고, 우리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겨 놓는다. 만난 시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치 않게 보인다. 다른 시간을 얘기했더라도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은 다르다. 복음은 한 개인적 새김으로 그 사건을 증언한다. 세밀한 표현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 모두도 “때는 오후 네 시”와 비슷한 체험, 주님과의 만남에 절정의 순간을 갖고 있다. 그런 순간들은 어려울 때에 우리를 지탱해 준다.

요르단 강 일부.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말씀하십시오, 주님

주님과의 만남은 이 첫 번째 제자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사건의 특성 자체가 전달로 이끈다. 이런 체험은 반드시 나누어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구원을 원하는 백성들의 여정은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시작된다. 이 만남은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사무엘서는 아름다운 성소 이야기를 말해 준다. 처음에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 사무엘은 혼동하여, 엘리가 그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사제의 충고에 따라, 사무엘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에게 복종한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 3,10)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속하므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1코린 6,13-15) 우리들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다.(6,1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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