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2월 17일(대림 제3주일), 요한 1,6-8.19-28

지금은 깨어 있어야 하는 때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때이므로 이 시기의 첫 주간 일요일의 성서들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는 때다. 우리는 이러한 기대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기뻐하다

전례에서 보면, 모든 깨어 있는 자세는 회개하는 측면을 동반한다. 즉 지금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탈하고 앞으로 올 것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돌아섬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성탄의 팽팽한 요구에도 오늘의 성서는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5)라는 오늘의 입당송과 제2독서(1테살 5,16)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깨어 있으려면 우리 존재가 각성하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야 하지만, 마치도 고통받고 풀이 죽은 것처럼 응답해서는 안 된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다가오는 만남에 대한 기쁨을 기대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매우 중요한 것을 덧붙인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권태로움과 슬픔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은 창조의 불꽃을 잃게 만든다. 즉 기다리면서 긴장하지만, 또한 “평화의 하느님”(1테살 5,23)께 대한 기쁨이라는 생명 가득한 불꽃을.

해방의 길을 닦다

대림시기를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시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중요한 복음 구절들의 원천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명을 정의하면서 다양하게 이사야서를 인용한다.(루카 4,16-20. 7,18-28; 마태 11,2-6) 주님의 영을 받아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셨다.”(이사 61,1) 이 세상에 보내졌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을 지탱시켜 주는 생명과 해방의 메시지다.

우리는 이 선포를 매우 신중하게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여러모로 생각할 때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그의 이름을 받은 것 같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잘 알았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겸손과 분별력을 지니고 사명에 임했던 모범이라고 제시할 수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백성들의 우두머리들 앞에서 몹쓸 취조를 받는 동안(요한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은 바로 이 권력자들을 의미한다), 이 선구자는 간결하고 온건하게 대답한다. 그는 자기를 먼저 두지 않고 주님 뒤에 놓는다.(요한 1,27) 그의 역할은 단지 밭고랑을 고르게 만드는 일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유일하게 예수님이고, 그분이 말씀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대체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 뒤에 오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요한처럼 선구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는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물러서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기”(요한 1,27) 때문이다. 전 교회는 선구자와 똑같은 영성을 지녀야 한다. 특히 어떤 모양으로든지 교회의 대표자들인 경우에 더욱 그래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 기쁨의 원천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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