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2월 3일(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

깨어 있기. (이미지 출처 = Unsplash)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하자.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 시대의 징표에, 역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한다.

예측할 수 없는 만남

마르코 사가는 그의 복음서 시작에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때가 찼다.”(마르 1,15) 그는 하느님의 때, 알맞은 때, 충만한 때 -어떤 특정한 날짜를 정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마르코는 kairos라는 단어를 쓰면서 주님이 우리와 만나기 위하여 오시기로 선택한 때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

그러나 상식을 고려하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이 말에 반대할 수 있다. 우린 언제나 같은 날에 성탄을 기념하지 않는가? 그러나 대림 첫 주간 일요일에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들이 가진 단조롭고, 정체되고, 연대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한다. 12월 25일은 우리의 현재 삶과 역사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없어도 왔다가 갈 수 있다. 끝도 없는 광고와 케이크 한두 개로 지내는 우리의 성탄은 바오로가 말하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날”(1코린 3,8)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탄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1코린 1,6)이 우리 안에 힘을 불어넣지 않고서도 왔다가 지나갈 수 있다.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마르코 복음서가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 그저 단 한 번으로 우리가 얻어 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멎어 있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전례는 철야, 예를 들면 과월절 철야같이 깨어 있음과 그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함께 사랑한다. 마르코 복음서의 문지기처럼,(마르 13,34)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사건들 속에서 그들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백성들의 희망이 죽어 가는 것을 느낀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하는 것은 그런 불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우리 행동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망상이 아니라, 희망을 일으키는 것은 대림시기의 “성실하신 하느님”(1코린 1,9)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때는 그분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만남은 때가 되면 필연적으로 오는 운명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신다”(이사 64,4)는 구절을 듣기 때문이다.

실상, 정의는 회한과 낙담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이사 64,3) 행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실 것이며, 성탄 축일은 우리의 삶과 우리가 속한 백성들의 역사에 의미를 가져올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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