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로 가는 길 - 호인수]
“이 작은 마을에 지난 일 년 동안 현감이 네 번 바뀌어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수령의 행차를 보내고 또 맞느라고 마을은 결딴이 나고 백성들은 두 발로 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수령의 전별금을 모으고, 돌을 캐고 다듬어서 송덕비를 세우는 사이에 신관 행차가 또 들이닥치니, 전관보다 신관이 더 두려울 것은 인지상정인지라, 새 현감을 맞느라고 길을 닦고 풀을 뽑고 동헌 지붕 수리하고 서헌에 도배장판 새로 하고 산에 올라가 꿩, 노루 잡고 강에 나가 은어 잡아서 잔치에 대령하고 곡식을 거두어서 예물을 장만하느라고 논에는 멸구가 끓고 피가 가득 올라와도 백성들은 여름내 관아에서 신역을 바쳤습니다. -중략- 바라옵건대 백성의 가냘픈 팔목을 비틀어 손에 쥔 밥을 빼앗지 마옵시고, 선정인지 악정인지는 소인들이 입에 담을 바 못되오니 신관 사또가 오래 머물도록 하여 주십시오.”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구례 강마을 노인들이 관찰사에게 올린 소장이다. 나는 6년 전에 인천 부개동 본당에 발령을 받고 신자들에게 부임인사를 하면서 김훈의 소설 ‘흑산’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임하던 날 막 성당 마당에 들어서는데 늙수그레한 남자 교우 한 분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노인 신부님이 계시다가 은퇴하셔서 이번에는 젊은 분이 오실 줄 알았는데 또 노인이 오셨네요.” 첫날 밤 내내 그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며칠을 지내면서 보니 그 분이 왜 초면인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주일날 부임인사를 뜬금없이 소설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유다. “부개동은 제가 선택해서 온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를 콕 짚어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주교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한 가지는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여기를 떠날지 모르지만 떠나는 날까지 어떤 이유로든 저 때문에 교우들이 돈을 갹출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부임인사로는 적당치 않았다. 하지만 은퇴감사미사를 하는 날까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아무려니 어떤 사제가 조선시대의 탐관오리 행각을 벌이겠나. 이제 정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촌지라는 명목의 봉투를 참 많이 받았다. 초년생 때는 받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는데 사제생활을 한 해 두 해 더해 가면서 서서히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이건 뇌물이 아니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의표시니 받아서 좋은 일에 쓰는 게 더 인간적이고 옳은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닌데 뭐. 달콤한 유혹이자 자기최면이었다.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속담은 공연한 말이 아니었다. 일단 호주머니에 들어오면 내 돈이란 생각이 들어 선뜻 꺼내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봉투를 건넨 사람에게는 어쩐 일인지 눈도 잘 못 맞추겠고 해야 할 말도 망설이게 되는 거였다. 한 번 받고 두 번 받으니 나중에는 또 누가 안 주나 은근히 바라는 내 몰골이 한심했다. 더럽고 치사하고 창피했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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