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로 가는 길 - 호인수]

성당 입구에 비치한 사제 영명축일 봉헌함. ⓒ왕기리 기자

으레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 제대 앞에 나와서 꽃다발을 받고, 영적 예물이 새겨진 근사한 패를 받고, 늘어선 교우들에게서 차례로 물적 예물(돈 봉투)을 받았다. 미사 후에는 떡 벌어진 잔칫상을 받았다. 주임신부님이 하라는 대로 했던 보좌 시절 나의 영명축일 축하식이다. 주임이 된 뒤에도 두서너 번 더 그런 행사를 했다. 전국의 많은 본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행이요 관례다.

내게는 매달 받는 활동비의 몇 배가 넘는 꿈 같은 횡재였다. 동기들끼리 만나면 받은 돈의 액수를 비교하고 그 액수가 마치 내 본당의 수준이 어느 정도며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제인가를 평가하는 잣대나 되는 것인 양 속셈을 했다. 이런 날은 비단 영명축일뿐이 아니다. 서품 10주년, 20주년 기념일이 따로 있고 그 절정이 25주년 되는 은경축이지 싶다. (나의 동창 신부들 가운데는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환갑잔치를 두 번이나 받아먹은 친구가 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었다.)

성직자의 영명축일이나 기념일은 그래서 교구 사목위원들이 교구장을 챙기고 본당의 구역장이나 반장들이 집집을 방문해서 ‘영신의 아버지’를 위한 ‘성의 표시’를 갹출하는 씁쓸한 날이 되어 버렸다. 과연 사제는 신자들의 영신의 아버지인가? 비록 ‘영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자녀들의 효도를 받는 것이 마땅한가? 예수는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라 하셨는데 도대체 영신의 아버지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 낸 용어인가? ‘사제=아버지, 신자=자녀’라는 출처 불명의 그릇된 고정관념이 한국 교회를 성직자 중심의 수직적 조직으로 만든 주범이다.

지금까지 듣기에도 민망한 돈 이야기를 무려 3회에 걸쳐 쓴 이유는 두 가지다. 사제라면 돈에만 눈이 멀어 살 리 만무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납득할 만한 명분 없이 모금을 하거나 은근히 분위기를 조성, 또는 방관하는 행위는 명백한 불의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요 폐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알게 모르게 폐를 끼치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제가 신자들에게 끼치는 폐가 당연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일꾼이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는(루카 10,7)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죄를 낳는 욕심이다.(야고 1,15) 

김영란법이 제정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인천교구의 한 병원에서 끝없는 추문이 흘러나온 지 오래다. 그런데 대책이 안 보이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 한가운데 돈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촌지였을 거다. 바늘 촌지가 소 촌지가 되었다.

더 큰 이유는 아름다워야 할 촌지가 오히려 사제인 나의 몸과 마음을 점점 더 추하고 못 쓰게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나를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교회에 만연된 갖가지 촌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신자는 사제가 아무리 고맙고 존경스러워도 더 이상 돈 봉투를 건네지 마시라! 본당신부는 견진성사를 집전한 주교에게 과도한 사례비를 바치지 마시라! 그것은 마약 같아서 거절이 극히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열린 교회로 가는 길의 맨 앞에 주교 신부가 있다. 그들이 망가지면 안 된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