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9월 17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마태 18,21-35

이른바 예수의 제자라면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고 비워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다들 이야기한다. ‘버린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아르네오마이’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흔히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고, 제 욕심과 의지와 악행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자세만큼 자신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늘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은 실은 자신을 버리기보다 자신을 더더욱 찾아 나서는 것이며, 자신을 찾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은 자기 상실과 자기 억압이 아닐까, 한다.  

예수는 반듯한 삶이든, 부족한 삶이든 일단 자기 자신을 고치고 다듬고 바로 세우는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고 당부한다. 십자가를 두고 두 가지만 짚어 보자. 일단 십자가는 ‘제 것’이어야 한다. 예수의 것도, 다른 이의 것도 아닌 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이다. ‘짊어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아이로’인데 ‘일으켜 세우다’라는 뜻을 지녔다. 요컨대 십자가는 ‘제 것을 일으켜 세우는 무엇’이어야 한다. 이건,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버리는 것’과 다르다. 제 것을 다시 일으키라는 말은 어찌 보면 제 본래 모습, 제 존재의 본디 가치를 회복하라는 말이 아닐까. 제 의지가 작동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자아가 아닌 본래 있는 그대로의 자아, 그것이 때론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겸허히,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예수는 찾고 있다. 

제 것을 다시 일으키라는 말은 제 본래 모습, 본디 가치를 회복하라는 말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어지는 복음의 내용은 그래서 당연하다. 제 목숨을 구하라는 말은 숨구멍에 들락거리는 바람의 유무에 따른 개념이 아닌, 존재함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모두에겐 제 존재 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없다. 예수도 아무리 가난하고 비루하고 비천하더라도 사람은 그 존재하는 것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수도 없이 가르쳤다. 예수를 따르는 건, 제 존재의 참된 가치를, 사람됨의 본래 의미를 다시 회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신념과 이념들이 부딪히고 그 속에 제 정체성과 존재함의 가치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혼돈과 갈등 속에서 자신을 찾아 나서는 길은 가끔씩 패거리를 지어 시류에 휩쓸리는 조폭의 논리에 매몰될 경우가 많다. 지금 맞다고, 옳다고 외치는 것은 정확히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반성과 맞물려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 그 옳음과 그름의 판단 기준에 적합한가를 먼저 묻는 이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건,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렵다. 우린 얼마간의 자기 회피와 상실, 그리고 기만을 살고 있으므로….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