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 용서를 통해 저 하늘마저 이 땅 위에 함께할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게 예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마태18장은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용서하는 공동체, 그 누가 되었건, 어린이든 가장 작은 자든, 잘못을 저지른 자든, 그 누가 되었건 용서하는 공동체가 교회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를 가르치는 이로 특정한다. 유대 사회의 랍비들이 가르치는 율법주의적 자세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완전한 개방과 사회적 연대의 적극적 실천(7,12.21-23; 25,31-46)을 예수는 줄곧 가르친다. 요컨대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세상에 온전히 열려 있는 것으로 제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한다.

열려 있음에 대한 실천은 대개 사회운동으로 이어진다. 사회 속 갈등과 불의에 교회는 제 나름의 소신을 지니고 함께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다만, 함께하는 것이 제 정체성을 제거한 것이라면 곤란하다. 요즘 일각에서 벌어지는 가톨릭 교회 내 비판과 그 비판의 구체적 행동들은 ‘시민단체’로서의 정체성에는 부합하나, 예수가 가르친, 그리고 교회가 오랜 역사 속에 지켜 온 정체성과는 거리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비판과 사회참여의 다양성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지만, 교회는 ‘시민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교회는 용서하는 공동체다. 용서를 통해 저 하늘마저 이 땅 위에 함께할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게 예수다. 교회와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 뼈아픈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제 위신과 체면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와 세상의 부조리를 이용하는가는 소위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늘 지녀야 할 성찰의 기준이다. 적이 있어야만 비판과 저항의 칼날을 갈고 닦는 ‘싸움닭’은 교회의 사회참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신앙인은 제 스스로 쇄신하는, 제 부조리와 모순을 부끄러이 여기는 회개의 자세로 세상과 함께해야 한다. 신앙인은 제 모습 자체를 두고 비판과 저항의 칼을 가는 것이고 그 칼을 스스로에게 찌르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고 불의에 저항하는 공동체다.

간음한 여인도, 사기 친 세리도 아무런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는 예수는 화해와 친교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메시아다. 정의, 사랑, 선 자체인 예수가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승만이든, 박정희든, 전두환이든, 박근혜든,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그들의 죄악 역시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자세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세다. 누구를 물어뜯고 죽이고 나서, 정의를 이루고 쇄신을 이뤘다는 자기 기만에서 해방되는 게 용서하는 공동체, 교회 안의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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