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27일(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예수 시대 민중의 삶이 피폐해진 건, 로마의 세력도, 강도들의 약탈도, 노동의 가혹함도 아니다. 사두가이,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가르침과 삶의 태도 때문이다. 예수는 정확히 그 지점을 간파했다. 바리사이와의 논쟁에서 율법의 형식적, 실천적 문제보다는 민중의 삶에 대한, 인간다움에 대한 준엄한 가르침을 예수는 내어 놓았다. 하느님을 팔아서 제 신념과 제 이익을 챙기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늘 부족한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예수 시대 민중은 현실의 가난에 덧붙여 신앙의 가난까지 짊어져야 했다.

사람은 물질적 가난엔 놀랍게도 강하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대개 자존감이 심각히 훼손되었을 때다. 신앙인의 자존감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 민중은 예수를 예언자 중 하나로 보았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로 예수를 인식했다. 아니, 인식하고 싶었을 것이다. 삶의 처지를 바리사이처럼 철저한 율법준수로 꾸며 가질 못했고, 저 사두가이들처럼 권력과 명예를 얻어 누리는 건 다른 세상일과 같았던 민중에게 예수는 얼마간의 생기를 불어넣었을 테다. 신앙인의 자존은 바로 말씀으로부터 누리는 생기다! 단죄하는 말씀이 아니라, 전례 속 거룩함을 치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민중의 일상에 파고들어 그들의 피곤함과 고단함을 씻어 줄 수 있는 예언자들의 살아 있는 말씀을 예수 시대는 물론 모든 세기에 걸쳐 신앙인들은 갈구한다. 신앙인의 자존은 이런 말씀에 대한 갈구 속에 조금씩 성장한다.

예수를 통해 말씀은 민중 사이에 파고들었고, 베드로는 그런 예수의 신원을 정확히 짚어 냈다. 민중과 하늘을 적당히 벌여 놓은 채 그 사이에서 민중의 시선을 미래로, 메시아가 올 미래로 향하게 하곤 지금의 명예와 권력과 돈다발을 움켜쥐었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완 예수는 달랐다. 지금, 이 자리에 예수는 메시아로 굳건히 서 있음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말하자면 하늘이 땅에 있고, 땅은 그 하늘을 품고 있다. 이젠 그 어떤 것도 하늘과 땅을 갈라 놓고 사기치듯 놀아나지 못할 테다.

▲ 땅은 그 하늘을 품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얼마 전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재산이 공개되었다 한다. 그들이 가진 돈은 서민들의 수준을 한참이나 웃돈다. 더욱이 분배정의에 앞장섰던 몇몇 인물들의 재산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흔히 ‘강남좌파’라 했던가.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돈다발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이 외쳤던 분배정의가 이 사회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그런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얻어 누리는 돈다발에 얼마간의 부끄러움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예수는 민중들이 바라는 정의와 하늘의 정의를 하나로 묶었고, 그런 이유로 메시아다. 더 이상 하느님과 민중 사이에 이간질을 그만했으면 한다. 정의니, 평화니, 분배니 외치면서 민중을 가르치려 하는 태도, 그 민중은 정의니, 평화니, 분배니 하는 그들의 사탕 발린 소리에 희망과 기대를 걸지만 삶의 처지는 그들과 엇박자를 보이는 현실, 예수 시대 사두가이, 바리사이와 민중의 괴리를 보는 듯하여 마음이 불편하다. 제 학식이나 신념을 외치기 전에, 제 삶의 양식과 처지가 민중의 삶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살펴보는 건, 지식인과 공무원의 기본이 아닐까 한다.

수년 전, 농촌 본당에 사목을 한 적이 있다. 눈이 엄청 온 날, 길이 미끄러워 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거동조차 힘들었던 날, 그 농촌의 공무원들은 그 농촌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 농촌이 아니라 도회지에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자주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을 잡고 함께 웃어 주고 울어 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함께 살진 않았다. 생각할 거리가 많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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