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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변하고 싶지 않다[채성욱 선생의 학교]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또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신 저분들이 원했던 세상,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이 살고 있는 저들이 막으려 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불과 37년 전 그토록 원했던 세상이 어쩌면 촛불혁명을 성공시킨 오늘날의 모습과 많이 닮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분들의 죽음이 더욱 허탈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오늘날 광장에서 총 맞을 위험 없이 촛불을 들 수 있었음에 더욱 감사했다.

초등학교에서는 5학년 2학기부터 6학년 1학기까지 일 년에 거쳐 사회 시간에 우리의 역사를 공부한다. 해마다 역사를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은 광주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정말 많은 변화를 이루어 왔다는 점이었다.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영국의 한 기자가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과 같다는 조롱을 했다는데 오늘날 우리는 세계가 주목한 촛불 혁명을 성공시켰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놀라운 발전은 폭력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목숨까지 내버리며 투쟁하고 저항한 우리의 선배들과 더 나은 세상과 상식이 통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상을 열망한 놀라운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교사로서 살아온 불과 14년 만에 교육환경은 많이 향상되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교장의 권위가 그나마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혁신학교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학교에서 가능해지고 있다. 아직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승진제도도 교장 공모제를 통해 조금씩 흔들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변화하지 않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주체. 그것은 바로 일반 교사들 자신이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변화를 정말 싫어한다. 그들은 마치 ‘귀찮음’이라는 사이비 종교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같아서 고민, 인식, 투쟁, 각성, 변화, 논의, 저항 등의 사고는 철저히 차단한 채 오로지 아무 일 없이 시키는 것만 하면서 죽은 듯 지내다가 제 시간에 퇴근하는 데만 집중한다. 대부분 5시 전에 칼퇴근하는 신의 직장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교직원회의를 하다가 4시 20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회의는 거의 진행 불가능 상태로 빠지고 만다. 이 무렵 의견이나 질문을 던지는 교사를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교장, 교감이 아니라 동료 교사들이다. 그들에게 이런 ‘벌떡이 교사’는 해 봤자 소용없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저항이나 문제 제기로 퇴근시간만 늦추는 철없고 사회성 부족한 못난이일 뿐이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그 어떤 질문에도 교사들은 ‘네’라고 서둘러 대답해 버린다. 가장 좋은 회의는 심도있게 논의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회의가 아니라 일찍 끝난 회의다. 교사들의 이런 심리를 일부 교장, 교감들이 악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론이 나올 것 같은 사안에 대해서 교직원 회의를 열어 줄 것을 요구하자 학교 일정을 이유로 퇴근 직전인 4시에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이미 회의 시작 전부터 이 시간에 무슨 회의냐는 짜증과 퇴근이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얼굴에 배어있던 교사들은 역시나 별다른 고민없이 교장의 손을 들어 주고는 마치 바퀴벌레가 흩어지듯이 자기 집을 향해 사라지고 말았다. 제 시간에 집에만 보내 준다면 민주주의 따위는 내다 버려도 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외에도 교사들과 함께 하다 보면 정말 변화를 원치 않는 구나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게 된다.

   
▲ 그들에게 이런 ‘벌떡이 교사’는 해 봤자 소용없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저항이나 문제 제기로 퇴근시간만 늦추는 철없고 사회성 부족한 못난이일 뿐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교사들이 이런 행동을 내면화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 사회가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는 것이 원천 봉쇄된 불통과 비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조직이라는 점이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에는 상관의 직무상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공무원의 복종의 의무가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과연 상관의 직무상 명령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교장이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켜야겠다며 학년 단위 시험을 실시하라고 한다 해 보자.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 단순히 점수로 평가하는 시험은 실시하지 말자고 해 봐도 교장에게도 성적 향상이라는 교육적 목표와 근거가 있기에 이를 무산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다 교장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그들이 가장 마지막에, 이는 교장으로서 직무상 명령에 해당하며 공무원인 이상 복종의 의무가 있다는 카드를 꺼내 버리면 사실상 대화는 끝나고 만다.

얼토당토않은 요구나 명령이 아닌 웬만큼 교육적이라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이유를 붙일 수 있는 것이면 사실상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그런 구조가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상당수의 교사가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말이나 꺼내고 대들어서 점수도 깎이고 결국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상황에 몰리느니 차라리 내 생각 따위는 접어 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서 실속도 차리는 쪽으로 내적 합의를 해 버리고 만다. 민주적으로 의견 제시를 해 본 적도 없고, 해 본다고 해도 수용된 적도 없다. 게다가 말 한 번 꺼냈다가 크건 작건 불이익까지 받는 경험이 단 몇 번만 쌓여도 대부분의 교사는 마치 기계처럼 하라는 것은 기가 막히게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안 하는 참으로 ‘착하고 순한’ 노예들이 되게 된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미 어릴 때부터 순종적으로 살아온 존재들이란 이유도 크다.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의 수준을 보면 가히 놀랍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고작 초등교사가 되겠다고 이렇게나 높은 점수의 아이들이 몰리는 현상을 복 받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렇게 높은 점수를 얻는 아이들의 경우, 그리고 이런 점수를 가지고 교대를 택하는 아이들은 더더욱 기존 제도나 부모, 윗사람들에게 순종적인 경우가 많다. 초,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이쁨받으면서 높은 점수를 유지한 아이들이 대학생 시절에는 교수들에게 이쁨받으면서 좋은 학점을 받으며 지내다가 임용고사에서 높은 점수로 합격하면 교사로 발령을 받아 현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마치 영화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가 겪는 엄청난 계기가 없다면 이들은 그냥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이렇게 곱게 곱게, 이쁘게 이쁘게 자라온 이들에게 투쟁 전선에 나서서 깃발을 흔들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도 허용된 것만 해야 한다는 의식이 너무나 팽배하다. 같은 교통 법규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경우 우리와 적용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유턴을 하라고 표시한 곳에서만 유턴을 해야 하는데 미국의 경우 유턴을 하지 말라고 금지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유턴이 가능하다. 이는 단순한 차이인 것 같지만 이런 제도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그 차이는 결코 단순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다. 허용된 곳에서 허용된 행위만을 해야 하는 사회, 거기에 공무원이라는 사회적 책임까지 덮어씌워 버리면 어느새 창의성과 주인의식,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식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잘 훈련된 똑똑한 노예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정권은 그런 공무원을 너무나 반겨 준다.

   
▲ 이렇게 높은 점수를 얻는 아이들의 경우, 그리고 이런 점수를 가지고 교대를 택하는 아이들은 더더욱 기존 제도나 부모, 윗사람들에게 순종적인 경우가 많다. (이미지 출처 = Flickr)

마지막으로 가장 큰 근본적 원인은 교사 스스로가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어나면 괴롭다. 괜히 깨어나서 몇 마디 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승진 탈락, 다른 학교 전근시 밀리기 등의 온갖 불이익과 부담스러워 하는 동료들의 눈빛이다. 깨어나지 않아도 받는 것은 그대로다. 아니 더 많아진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속하는 교사이고 은행에서 대출도 잘되는 공무원이다. 아이들은 변함없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라다니고 1년 단위로 호봉은 꼬박꼬박 올라간다. 변화시키겠다고 죽어라 뛰어 봤자 어차피 4-5년 뒤면 다른 학교로 가서 다른 교장, 교감, 교사들과 살아야 하고 다른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내가 가지 않아도 교장이 바뀌면 학교가 확 뒤집혀 버린다. 어차피 이래저래 다 뒤집혀 버릴거 왜 그 고생을 하나? 지금 여기가 상태가 안 좋으면 조금만 참았다가 상태가 좋은 곳으로 치고 들어가면 되는데 말이다. 깨어나서 대들어 봤자 얻는 것도 없고 꼬리표만 붙는데 차라리 그냥 꿈속에서 헤매다가 다른 꿈으로 들어가는 게 백 번 속 편하다. 그래도 돈은 나오고 시간은 가니까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현실보다 가짜가 훨씬 달콤하다.

교사 사회의 이러한 특징은 일부 변화를 꿈꾸며 저항하는 교사들에게 큰 좌절과 상실감을 심어 준다. 차라리 교장, 교감이랑 맞서 싸우는 게 낫지 직접적으로 교류해야 하는 동료 교사들과 맞서게 되면 더욱 힘들고 스트레스가 심해진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혁신교육이 활성화되고 많은 혁신학교들이 실질적으로 큰 성과를 내고 있지만 내면을 바라보면 변화하지 않는 교사 사회에 지쳤거나 끊임없이 변화를 열망하는 교사들은 혁신학교나 진보적 지역으로 몰리고, 그렇지 않은 교사들은 그냥 일반학교에 머무는 새로운 이분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교사들이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성과물도 널리 보편화되지 못한다. 이는 곧바로 아이들에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변화를 일궈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변화를 갈망한 분들의 피를 먹고 자라온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는 저항과 변화를 통해 발전해 왔다. 목숨으로 저항하면서 변화하고자 발버둥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부 군인들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몇 명이 모여서 뽑고 있을지도 모른다. 촛불 따위는 애초에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이 사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선대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우리도 후대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 따라서 부당함에 저항하고 변화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변화한 세상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아가면서 정작 본인은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집단의 특징이나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와 우리 아이들에 대한 반역이자 배신이고 비겁한 행위다.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있다. 우리가 어떤 대가를 얻을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교사들이여, 우리 이제 저항하고 변화하자.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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