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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교육은 필요한가?[채성욱 선생의 학교]

수학시간. 선생님에게 문제 푸는 방법을 배우던 2학년 여자아이는 갑자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꼭 저렇게 풀어야 할까? 다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아이는 문제를 푸는 시간에 혼자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본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보다 속도도 느리고 정확도는 말할 것도 없이 형편없다. 교실의 아이들을 둘러보던 교사는 이 아이를 보고 당황한다. 이 아이의 시도는 훌륭하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주도적 학습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학습 방법이다. 이 아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교사가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스스로 찾아가는 학습을 장려하라고 교육과정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교사는 이 아이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 

가르쳐야 할 교과 진도는 말할 수 없이 빡빡하고 다른 아이들은 벌써 교과서에 나온 대로, 교사가 가르쳐 준 대로 문제를 다 풀고 떠들기 시작한다. 이 아이를 붙잡고 있다가는 나머지 30여 명의 아이들이 진도도 못 맞추고 늘어질 판이다. 어쩔 수 없이 교사는 너의 생각과 시도가 틀리진 않았지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아이를 건너뛰어 버린다. 그렇게 건너뛰어진 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방법으로 학습을 찾아서 한 것뿐인데 뒤처지기 시작한다. 결국 본인의 욕구와 궁금증, 앎의 방식에 대한 탐구를 억누른 채 하라는 대로 꾸역꾸역 하다가 학습의 흥미를 잃어 버리기 시작했고 학급 아이들에게서도 뭔가 이상하고 독특한 아이로 낙인 찍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3학년이 되자 부쩍 늘어난 학습량(교과 진도)을 이 아이와 새로운 담임교사는 감당하지 못한다.

잘못된 것이 없는데도 고통받는 아이를 지켜보던 부모는 3학년 담임 선생님과 심도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미 대안학교 학부모로서 활동하던 담임교사는 조심스럽게 대안학교에 진학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부모는 이른바 공교육(제도권 교육이라 부르는 것이 더 알맞다.)을 떠나 대안교육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초등 대안학교에 진학한 아이는 한동안 마치 얹혀 있던 것을 토해 내기라도 하듯이 제도권 교육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토해 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대안학교 교사들은 이 아이를 끝까지 안아 주고 받아 주고 기다려 주고 이끌어 주었고 한 학기가 끝나자 제도권 교육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행복한 표정이 아이의 얼굴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이 나름의 방식과 책에 있는 기존의 방식을 서로 비교하고 검토하고 비판하며 그렇게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바르고 냉철하게 배워 가며 살아가고 있다.

눈치챈 분들도 계실 것 같다. 그렇다. 내 딸아이의 이야기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부모는 이른바 공교육(제도권 교육이라 부르는 것이 더 알맞다.)을 떠나 대안교육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우리 인류가 자연계에서 살아남기 극히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이토록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획일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유전학에 의하면 우리의 유전자는 멸종까지 불러올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30퍼센트 정도의 예외를 둔다고 한다. 유전적으로 30퍼센트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유전학적으로 조금씩 다른 것이다. 백신을 맞지 않았는데도 특정 바이러스에 항체를 지닌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이러한 유전적 예외성, 다시 말해 본능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돌연변이로 인해 지금까지 발전해 온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초기 인류는 우유와 같은 동물의 젖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존과 영양 면에서 필수적인 동물의 젖을 소화시키기 위해 우리의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일으켰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상당수의 인류가 우유와 같은 동물의 젖을 소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돌연변이가 없었다면 우리의 모습은 아직도 박물관에서나 보는 털북숭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넘어 우리 인류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양성과 예외성을 통해 살아남았고 발전해 왔음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우리 사회와 우리 교육은 획일성과 통일성만을 강조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전 정권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 ‘하나된 대한민국’ 아니었던가. 분열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통해 다같이 발전하자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해 왔는지를 되새겨 보면 ‘하나된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뜩한 배경 속에 탄생하고 유지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비단 지난 정권에서만 이런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 평창올림픽 콘서트 주제도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인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내면 깊숙이 통일성과 획일성을 강조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아이들의 개성은 날로 강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우리의 학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가르칠 이유도, 여유도, 생각도 없다. 학교에서의 모든 학습 활동은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진행되는데 전에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거의 연극 대본 수준이다. 교사에게 재량으로 주어지는 시간도 있기는 하지만 빡빡한 진도와 다양한 학교 내외적 행사들을 진행하다 보면 사실상 국가 수준 교육과정을 마치는 것도 벅찰 때가 많다. 게다가 학급 안에 학생 수는 무려 30명이다. 물리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한 명의 교사가 다양한 아이들을 품어 주고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험상 15명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슬슬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정해진 진도와 정해진 내용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 정해진 곳에서 익히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이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는 것. 어느 공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학교의 현실이다. 만약에 유전자가 대한민국의 제도권 학교에 다니며 이곳에서 원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우리 인류는 이미 멸종당하고 화석으로나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이들의 개성은 날로 강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다양성과 창의성을 짓밟는 것 외에도 제도권 교육이 해체되어야 하는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계급의 재생산과 고착, 세습에 제도권 교육이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안학교에는 그토록 인색하고 엄격한 대한민국 교육부가 이상하리만치 너그러운 국제학교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한 언론 보도(JTBC, 2017.10.14. ‘학비 연 6천만 원.... 공기업이 지은 국제학교 논란’)에 의하면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이 제주도에 세운 캐나다계 국제학교의 연간 학비는 무려 6100만 원, 영국계인 다른 국제학교의 연간 학비는 5500만 원에 달했다. 이름만 국제학교였지 대부분의 학생이 내국인이었으며 이중 무려 35퍼센트가 강남, 서초, 송파 등 서울 강남 3구 출신이었다. 국제학교가 아닌 귀족학교가 공교육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곳 학생들은 결코 배움을 위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자신들과 비슷한 계층과 인맥을 쌓기 위해, 다시 말해 학연을 만들고 학벌 계급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다. 국제학교가 아니라도 암암리에 부자들이 다니는 몇몇 사립학교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학원도 그들의 학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결국 세금을 투입해 (저들에겐 세금이 그다지 필요없지만) 공공을 위해 운영한다는 공교육이 오히려 공공성을 해치고 계급을 구성하고 고착화시키는 데 앞장서며 정당성을 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다양한 아이들을 제대로 품지도 못하고 창의성 따위는 귀찮은 유별남에 불과하며 대학에 들어가는데 모든 것을 바쳐야 하고 특정한 이들에게 그들만의 계급장 역할이나 하는 곳.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제도권 교육의 현주소다. 이곳에서는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행복하려야 할 수가 없다. 더욱 암담한 것은 어떤 수술대에 올려 놔도 이 현실이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학부모들도, 교육에 몸담은 교사도, 노예처럼 억지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도 모두 이상하리만치 무기력하게, 그렇게 버티고 있다. 대학입시와 거리가 있는 초등까지는 상대적으로 덜 하지만 중등에서는 입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다 집어삼켜 버리니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다. 이런 상황에 어느 나라의 어느 제도, 어느 교수의 어느 제안을 받아들인들 무엇이 우리 교육을 바꿀 수 있겠는가? 제도권 교육에 채용된 제도권 교사로서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질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 우리의 제도권 교육은 그 삶이 다 했다. 더 이상의 발악은 환자를 더욱 고통스럽게만 할 뿐 아무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동안 교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면서 고민한 결과 이렇게 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글은 여기서 정리하려고 한다. 별거 아닌 존재의 생각을 풀어놓기에 민망함이 앞서기도 하거니와 더 나은 분들의 더 나은 고민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기에.... 그리고 모두가 열린 상태에서 고민하는 그런 것을 바라기에 어줍잖은 글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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