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욱 선생의 학교]

운동장에서 활동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뒤에 교사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반 친구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발차기를 해 버린다. 맞은 아이는 운동장에 나뒹굴고 교사도 너무 놀라 그 아이를 불렀다. 이유는 친구가 먼저 놀렸다는 것. 당연히 교사는 아무리 놀려도 그렇지 그렇게 욕설을 하면서 친구를 때려도 되는 것인지, 더군다나 교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 것인지를 물으며 때린 아이를 나무랐다. 그리고 다음날, 때린 아이 엄마가 학교를 찾아왔다. 이미 상황을 다 알면서도 교사에게 꼬치꼬치 상황을 다시 묻는다. 그러곤 저 아이가 먼저 놀렸다는데 왜 우리 아이만 가지고 혼을 냈느냐고 따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당신은 무능한 교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무서운 협박을 남기고 사라졌다. 먼저 놀린 아이를 교사가 혼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기 자식이 더 혼이 났다며 벌어진 일이었다. 지난 5월, 바로 옆 반 6학년에서 일어난 일이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마치 영화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봤을 법한 일이 왕왕 일어난다. A라는 아이는 평소 모든 면에서 뛰어나 교사와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B라는 아이의 부모가 A에게 맞았다며 학교를 찾아왔다.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A가 B를 때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평소 악성 민원으로 악명이 높았던 B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집요하게 A와 A의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평소 A를 부러워하던 다른 학부모들도 순식간에 A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호의적으로 편을 들어 줬던 학부모들에게는 B의 아버지가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함께 걸려들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을 했다. 결국 A는 학교폭력회의에 회부되고 말았다. B의 아버지는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모든 걸 없던 것으로 할 테니 합의금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경찰 조사까지 가서도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A와 그 가족은 더 이상 그 동네에 살 수가 없었고 결국 정든 동네를 탈출하듯 빠져나와 전학을 가야만 했다. 그리고 A의 학교생활기록부에는 학교폭력 내용이 기재되고 말았다.

병설유치원이라도 딸려 있는 학교에서는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유치원 교사는 자녀가 결핵에 감염되는 바람에 본인도 감염되고 말았다. 검사 결과 다행히 전염성은 없었지만 규정에 따라 휴직을 하고 몇 달 동안 약을 먹어야만 했는데 문제는 그 교사가 지도했던 유치원 아이들도 검사하고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학부모들에게 어디서 더러운 걸 걸려 가지고 애들을 가르쳤느냐, 그런 것도 조심하지 못하는 게 교사로 자격이 있느냐는 등의 항의에 시달리던 교사는 결국 퇴직을 신청하고 말았다. 또 올해 한 학부모가 갑자기 학교를 찾아왔다. 유치원 교사가 본인의 아이를 때렸다는 민원이었다. 이 사건도 경찰조사까지 갔는데 결과는 무혐의. 그러나 이미 교사는 학부모에게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욕설을 다 듣고 원형 탈모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 외에도 학교에서는 수많은 학부모들의 민원으로 시달린다. 상대적으로 학부모들의 관심과 아이에 대한 불안도가 높은 저학년일수록 민원은 더욱 심해져서 정말 사소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로 교사가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심지어 현재 1학년 담임교사 중 한 명은 스트레스로 인해 원인불명으로 발목이 부어올라 한 달 동안 병가를 내야만 했을 정도였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영화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봤을 법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미지 출처 = SBSNOW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물론 앞선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사나 학교 시스템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일부 학부모의 경우 이를 일부분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성급하게 일반화시켜 버리기도 한다. 당연히 교사의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교육활동 하나하나까지 모두 감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거나 심지어 확인조차 되지 않은 사안이 있더라도 무턱 대고 민원을 제기하곤 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학교라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식이라는 이기심이 먼저 작동하는 것 같다. 결국 이런 민원은 대부분 교사와 아이 모두에게 상처로만 남고 만다.

정상 방식의 소통은 교사에게 발전과 자극의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이른바 민원은 아무런 발전적 계기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퇴보와 의욕상실, 정신적 상처만 가득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교사가 한 번씩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자 최근에 와서야 교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교육청이나 교원단체를 중심으로 조금씩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런 사건을 당한 교사는 개인이 알아서 치료를 받거나 평생 그 상처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초등 사회과에서는 산업의 분류를 가르치면서 교육을 금융 등과 함께 3차 산업(서비스업)으로 분류하도록 하고 있다. 다분히 생산물을 중심으로 한 표면적 분류에 불과하건만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정부 차원에서 교육에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논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부모는 교육의 한 주체가 아니라 학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리는 고객으로 격상(?)되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10여 년 전만 해도 학교 공문에 ‘고객 만족’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을 정도였으니 천박한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교육이라는 전통적이고 인간적 가치를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했는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고객이 되어 버린 학부모는 당연히 학교가 제공하는 것들을 누려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요구할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학부모는 교육의 주체이자 한 기둥으로 교육을 떠받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학교와 교사에게 대접받고 서비스 받아야 하는 상관이 되어 버렸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교사, 학부모, 학생이 모두 함께 상호작용하고 서로 도움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간다. 이것이 교육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사로 살아온 나에게 교육이라는 것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한 인간을 바르게 키우는 공동체적 행위’라고 하고 싶다. 옛말에 아이는 한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한 마을이 모두 함께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키우는 것. 교사로서나, 부모로서나, 교육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나 경험이 쌓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다양한 대안학교도 그렇고, 양평의 작은 학교에서도 그랬다. 학교는 교육이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장소이자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곳이지 교육의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은 아니다. 학교라는 공간을 바탕으로 교사, 학부모, 학생이 모두 함께 상호작용하고 서로 도움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가는 것, 그것이 교육이었다. 결국 학교 교육이라는 것은 교육의 단편이고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상 교육에서는 고객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 학부모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학교는 공동체이며 본인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은 채 오로지 내 자식, 내 생각만 중요하게 여긴다. 소통하기보다는 관철시키려 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지배하려고 하고, 참여하기보다는 감시하려 하는 것은 교육을 위한 공동체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본인도 교육의 중요한 주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합당한 역할과 의무를 다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끊임없이 소통하며 함께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올바른 행동은 아닐까?

요즘 아이들의 폭력이 심각하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거나 감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일부 교사들이, 그리고 어린 시절 겪었던 일부 교사가 교사로서 부적합했다고 해서 모든 교사나 학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학교에 아이를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처음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내가 깨달은 것은 ‘자식 가진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교사임에도 그만큼 교사나 학교라는 존재가 학부모에게는 힘든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일부 학부모들이 보이는 행태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자정을 요구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과 비난과 욕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교사들도 인간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모욕당하지 않아야 하며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인간은 상처받고 그 상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진정 자기 자식을 원한다면 교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모욕하지 말고 존중하라. 그것이 참된 교육이며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자 선물이다. 그리고 한번 믿어 보시라. 나쁜 교사보다 좋은 교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당신이 부모라면 전화통에 대고 욕하기 전에 삶으로 모범을 보여라. 자식이야말로 언제나 부모를 바라보고 배워 가는 무서운 존재이니까 말이다.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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