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하느님의 백성’.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보물 같은 말 중에서 단 하나만을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이 하느님의 백성을 뽑겠다. 오래전부터 있던 용어지만 공의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친교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되살려냈다. 공의회를 바라보는 여러 입장 가운데 매우 대조적인 두 시각이 있다. 하나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공의회가 불러온 변화의 심각성을 인정하려하지 않는 경향이고, 다른 관점은 ‘새로운 오순절’로 표현되듯이 그리스도교라는 전통의 흐름에서도 눈에 띄는 비약이나 혁명적 변화가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혁명적’이라고 할 때 과거와 다른 어떤 내용이기라기보다는 ‘태도’와 ‘스타일’의 변화를 꼽는다. 과거의 비밀주의적, 권위적, 폐쇄집단적, 비난적인 언어와 태도에서 초기 교부시대에 보이던 친교, 대화, 설득, 초대, 동의, 공통기반을 바탕으로 하려는 방향으로의 변화야말로 ‘스타일’이 변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혁명적이라 말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50년 뒤 우리는 또 한 번의 성령의 역사하심, 또 한 번의 혁명적인 교회사적 순간을 맞게 된다.

2013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그가 선출 직후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나와 하얀색 평상복 차림으로 ‘좋은 저녁입니다’하고 인사말을 전했을 때 세계는 환호했다.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명칭이 그러하였고 또 수수한 단색의 흰 옷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신자들은 이심전심으로 그 감격을 실감했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 이 칠십대 후반의 교황은 이십대의 열정과 패기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겸손과 청빈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날마다 생방송으로 전 세계로 중계하는 것 같았고 세계는 이런 프란치스코의 모습에 열광했다. 한 달 만에 교황은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언론들은 앞 다투어 성직자의 삶은 ‘가난과 겸손’이어야 한다고 연일 보도함으로써 여론화, ‘공적 담론화’의 수준으로까지 가는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반(反)개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전임 두 교황의 한 세대가 넘는 길고 긴 터널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을 지나온 뒤였기에 더욱 그러했을까.

▲ 2013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대성전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우리신학연구소는 교황 선출 한 달 뒤 월례발표회를 열었다. 두 전임 교황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현 교황이 보이는 개혁적 면모를 찬찬히 따져보고 평신도 입장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교황직이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품어보는 설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나는 ‘철지난 꿈, 두 교황의 반(反)개혁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맡아 전직 두 교황의 사상과 교황직을 돌아보았다. 나는 서론 부분에서 결론 삼아 이렇게 썼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혁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두 교황은 이를 반대하는 반개혁적 교황직을 수행해왔고,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통과 중심을 재규정하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참으로 성실하게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밀어붙였다. 교회 안팎의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결과는 실패였다.”(<우리신학> 제11호 25-45쪽, 2015년 2월)

여기서 ‘전통과 중심의 재규정’은 미국 가톨릭 언론 <NCR>의 명 칼럼니스트 리차드 맥브라이언의 말에서 빌린 것으로, 그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그 뒤 한 세대 동안 계획적이고 조직적 노력으로 ‘중심 재구축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심은 당시 추기경단의 대부분, 미국 주교단, 오푸스데이,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 등의 옛 우파로 그 축이 이동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아시아가톨릭언론인 <UCAN>의 칼럼니스트 빌 그림은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품었던 큰 꿈 중의 하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고 떠나간 비오 10세회를 다시금 가톨릭교회 품으로 끌어안는 일이었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나는 발제문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공의회를 거부하는 ‘작은 꿈’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2세가 추구해온 ‘중심 재구축’을 통해 교회의 전통을 재규정하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프란치스코의 등장은 공의회 정신을 과거로 돌리려는 흐름을 차단하고 원상태로 회복시킴으로써 두 전임 교황들이 한 세대 동안 밀어붙여온 ‘보수화’ 기획은 실패했다고 본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베네딕토 16세의 ‘원대한 꿈’은 바로 이러한 전통 재규정이라는 과거로의 회귀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고 그것의 하나가 라틴어 미사 전면적 허용과 미사경본의 라틴어식 개정이었기에, 이번 한국 천주교회 미사경본 개정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 것이다. 평신도의 신앙이 표현되고 고백되며 성장하는 근거로서 신앙 감각, 곧 하느님을 알아보는 인지적, 심리적, 몸적인 총체적 능력으로서 신앙 감각을 현대인에게 맞는 언어와 사상으로 전하는 전례와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도직’이라는 말, 교회의 ‘직무’라는 표현이 평신도에게도 옳고 합당한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신앙 감각을 평신도가 가지고 있다는 데에 그 신학적 근거가 있다. (물론 그것은 하느님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우리에게 자신을 완전히 전달한 무상의 선물이다!)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총화이자 총체적 표현으로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가 주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당에만, 교회 안에만 묶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성체성사는 세상 삶의 구석구석에서 자신을 ‘제의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전 세계인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구현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많은 이’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몸과 피를 희생한 것이고, ‘사제의 영’이 아니라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그리스도가 되어 희생제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직도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과 성직자의 특수 또는 직무 사제직이 "정도뿐만이 아니라 본질에서의 차이"('교회헌장' 10항)가 있다는 표현을 위계상의 구분으로 받아들이는 한국 천주교회 풍토에서 이번 미사경본 개정은 이런 위계적 질서를 강화할 우려가 충분하다고 보인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이라면, ‘본질에서 다르다’는 표현을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유비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적 상상력이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교회적 상상력’이 아닐까.

▲ '사도직’이라는 말, 교회의 ‘직무’라는 표현이 평신도에게도 옳고 합당한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신앙 감각을 평신도가 가지고 있다는 데에 그 신학적 근거가 있다. ⓒ강한 기사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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