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교회사에 종종 보이듯 중세 이후 교회는 학문과 교육의 수호자요 교육자였고 스스로를 교사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궁극적 진리이자 신비인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알며 또 어떻게 그분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종교 교사로서 교회의 사명은 더없이 귀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와 그것이 발현되는 의례를 ‘계시헌장’과 ‘전례헌장’으로, 또 ‘하느님나라’의 상징이자 그것의 실현 주체로서 교회와 그 교회가 대화해야 할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대해 각각 말하고 있는‘사목헌장’과 ‘교회헌장’은 아무렇게나 ‘헌장’으로 반포된 게 아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본성이자 감각을, 믿음과 실천이 포함된 그런 신앙을 키우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궁극적 실재’와 그것에 감응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러브스토리’로서 때로는 신화로, 또 때로는 기도와 다채로운 의례 행위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전례와 기도는 하느님백성의 ‘신앙 감각’을 계발하고 성장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봤을 때 한국 교회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997년 춘계주교회의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존칭을 우리 고유의 예법에 맞게 고치고 서양식 표현을 쉬운 우리말로 부드럽게 다듬는 등 꼭 필요한 부분을 고친다’(<경향잡지> 1997년 8월호)며 ‘주의 기도’를 포함한 여러 기도를 개정했다. 1969년에 개정된 주의 기도를 바꾼 것이니 약 30여 년 만에 고친 것이다. 한 세대만의 개정이고 또 신자들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를 기도문에 반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교도권에서 마땅히 해야 할 권리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꾼 내용을 보면 신앙의 성숙과 성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리스도님’, ‘성령님’, ‘마리아님’ 등 ‘님’자를 붙인 점이다. 무조건 님을 붙이면 우리 고유한 예법에도 맞고 없던 존경심도 생긴다는 뜻이었을까.

그리스도는 고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히브리 말로는 ‘메시아’로서 ‘구세주로 선포된 존재’로서 더 이상의 존칭이 필요 없는 용어다. 여기에 ‘님’을 붙인다면 이는 ‘하느님님’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동어반복이라고 하겠다. 한국 천주교회에 훌륭한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개정과정에 이들이 참가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예수를 예수님이라고 하고 하물며 부처도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님이라고 못하냐는 생각에서 이렇게 쓴 것이라면 대단한 넌센스요 무지의 소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식으로 여겨질 게 불 보듯 뻔하고 또 이미 20년 전의 일이어서 열을 낼 처지도 되지 못하니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 한국염 목사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아버지'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이것 말고도 개정된 ‘주님의 기도’에서는 ‘아버지’를 강화하고 ‘우리’ 대신 ‘저희’로 일괄적으로 바꾼 것이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도 그 저의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개정 전 기도문의 ‘그 나라가 임하시며’를 ‘아버지의 나라’로 바꾸어 그 짧은 기도문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나오게 된다. 왜 이렇게 아버지를 좋아하는가.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이/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으로 숨이 가쁠 지경이다.

그런데 1836년 앵베르 주교가 처음으로 한자에서 한글로 번역한 ‘천주경’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를 빼고는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네 나라이/네 거룩하신 뜻....”으로 2인칭 대명사인 ‘너’를 사용하고 있다. 이 2인칭 대명사의 그리스어 원문(σου)은 ‘당신의’ 또는 ‘너의’ 라는 뜻으로서 오히려 앵베르 주교의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원문에는 ‘아버지’라는 뜻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를 고집할 아무 근거가 없으며, 또 아버지 대신에 ‘하느님’이나 ‘당신의’ 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불허될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개신교에서도 2004년 ‘주의 기도’ 개정을 둘러싸고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성 번역팀에서 그리스 원문을 바탕으로 낸 안을 보면 이를 간접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름이 거룩히 여김을/당신의 나라가 오게/당신의 뜻이...”로 아버지대신 ‘당신’을 사용했다. 개신교 내 극보수 우익 집단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부르면 공경의 의미가 덜하다거나 불손한 표현이라며 극구 ‘아버지’를 밀어부쳤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들의 의도가 불온한 것은 아닐까.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여성위원장인 한국염 목사는 왜 아버지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미지가 사람들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여러 번 불러가며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내면화되고 결국 남성으로서의 하나님 상이 각인되고 그로 인해 한국교회의 가부장상이 굳어지기 때문이다.”(<공동선> 2003년 통권 68호) 이 말이 단지 한국 개신교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천주교판 ‘주님의 기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앞서 지적한 ‘우리’를 ‘저희’로 전부 바꾼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심지어 '한기총 교회협 특위'의 번역안이 비록 앞부분을 아버지로 번역했지만 뒷부분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우리 죄를 용서/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로 ‘저희’가 아니라 ‘우리’를 쓰고 있다. ‘저희’로 낮추면 신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겸손을 깨닫고 그와 동시에 하느님은 한 단계 더 높아진다는 뜻일까.

오히려 ‘우리’가 아니라 ‘저희’로 말해지는 순간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교리로는 존재할 수 있어도 인간세계로 내려올 수 없지 않을까. 삼위일체는 ‘나, 너, 우리’가 평등하게 맺는 관계이며 그 안에 ‘인간 예수’가 그랬듯이 하느님께로 불리우고 초대된 신앙인 모두가 참여할 때 깨달아지고 완성된다. 개별적인 삼위는 산술적 의미에서 ‘1+1+1=3’이 아니라고 우리는 배우지 않았던가. 각각은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고 수용함으로써 하나인 ‘우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우리’를 여지없이 버린 것이 ‘개정’된 1997년 ‘주님의 기도’다. 신학적으로 이미 한국 천주교회에는 더 이상의 ‘우리’는 없다. 이는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며 이를 통해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감각은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의 시대, 그것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전기 조선시대로 곤두박질쳐졌다. 이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계속)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