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불과 보름 전 유럽연합 최고법원인 사법재판소는 직장 안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잡(머리 스카프) 착용을 금지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법재판소는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지만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내린 결정은 특정 종교에 대한 차별이 아니며 “공공이든 민간 업체든 고용주가 고객에게 중립적 이미지로 여겨지기를 원하는 것은 적법하며, 근로자들이 고객과 접촉하는 곳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밝혔다. 말만 따라가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간단하게 사건을 정리해 보자. 그 발단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의 한 회사에 근무하는 이슬람인 여성 사미라 아크비타는 2006년 4월 근무 시간에 히잡을 쓰겠다고 회사에 알렸고, 회사는 ‘고객에 대한 중립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복무 규정을 들어 이를 불허했다. 아크비타는 이에 불복하고 히잡을 계속 쓰다가 2개월 뒤 해고되자 무효소송을 냈다. 사건이 커지고 복잡해지자 벨기에 법원은 유럽사법재판소에 법률 해석을 의뢰했고, 사법재판소는 앞서 말한 대로 벨기에 법원과 비슷하게 ‘중립성’ 운운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종교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반 이슬람 정서에 적극적인 우파 정당과 정치인들은 오랜만에 나온 ‘반이슬람’적 판결을 반겼다. 프랑스 우파 공화당 대선주자인 프랑수아 피용은 “종교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제동을 걸고 사회의 세속적 본질을 수호하는 판결”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반면 유럽랍비회의는 이번 판결이 ‘종교 커뮤니티가 유럽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라며 반발했는데, 이는 앞으로 이슬람은 물론 시크교도와 같은 다른 종교인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적잖은 우려로 해석된다. 또 국제앰네스티도 ‘종교적 신념을 근거로 근로자를 차별할 재량권을 고용주에게 줬다’고 비판했다. 언론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유럽 내 반 이슬람 정서의 확산과 그것과 늘 쌍으로 언급되는 종교의 자유 문제에 우려했다. 그러나 정작 히잡을 쓰고 말고의 주체인 여성의 자기주도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종교와 삶이 나뉘지 않고 하나인 문화 상황에서라면 여성의 자기선택권은 종교의 자유 이전의 권리로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왜 언론은 ‘세속’ 대 ‘종교’라는 프레임에만 집착하는 것일까.

▲ 히잡(머리와 가슴 일부를 가리는 스카프)을 착용한 여성의 모습.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와 비슷한 예는 아니지만 최근에 한국의 한 성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성당에서는 부속 박물관 앞에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는 어린이와 여성은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표지판을 내걸었는데, 누군가 이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이곳은 밀폐된 공간이고 CCTV도 없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까 봐 안내해 놓았다고 해명했다. 언론에 따르면, 본당 측에서는 역사관에 따로 경비원이 없기도 하고 또 ‘성추행을 예방하기 위해 여성 홀로 입장을 금한다’는 내용을 성당에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여성 홀로 입장을 금한다’는 안내문을 붙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에도 관람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들어와서 서성거리고는 했다는 신자들의 전언도 있어서 그런 설명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문구를 접한 여성들의 반응은 성당 측의 그런 ‘친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성인인 여성이 ‘보호자’를 동반해야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당 측 설명대로 ‘성추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면 반대로 ‘혼자 들어오는 남성에 주의를 두거나 막으면 되지 않느냐’는 똑 부러지는 반응이고 보면 이 표지판 문구가 여성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게 아니냐’라거나 ‘성차별적인 표현’이라는 항변은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로 생각되는 것은 안내판 내용이나 그에 대한 성당 측의 설명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교회와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인식’에 더 근본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파고 들어가 보면 이 말을 선의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자기선택권, 자기주도권,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결말에 다다르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녀사냥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화하면서 여성을 집에 가두고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완성된 서구적 부르주아지의 여성상, 가정상이 부동의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역사는 오늘에도 현재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이런 식으로 증거하고 있다고 보인다. 교회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 일의 대부분을 하면서도 대표직에는 늘 ‘깍두기’로만 참가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한국 천주교 여성 현실이 과연 여성의 능력 때문인가? 각종 행사 때 한복으로 치장하여 시중들게 하는 것 외에 여성들에게 구조적으로 무엇을 허하고 있는가?

앞서 보았듯이 히잡을 둘러싸고 유럽에 횡행하는 종교적 불관용과 반 이슬람 정서에 대해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인 여성과 남성이 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히잡이 그것을 쓰도록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산물이요 상징이라면, 그것을 쓰고 말고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이슬람인 여성이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여성에게 겨우 눈만 보이도록 제작된 부르카나 차도르를 입히고, 또 ‘차 사고로 다칠까 봐’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면허시험의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 이슬람의 근본주의 집단이 내세우는 것은 늘 ‘여성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이었다. 그 뒤에는 남성 중심의 이슬람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의 탁자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게 하는’ 여성 거지 라자로로 모든 여성을 만들려는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여성은 그 상황을 인식할 만큼 똑똑해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든 이슬람이든 여성이 똑똑하면 체제에 위험이 되므로 자고로 ‘제대로’ 교육받은 이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여성이 현재의 차별적 구조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교육과 양성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한국 천주교회는 미래의 전망은 고사하고 그 생명력을 다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녀 평신도가 연대해야 한다면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공유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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