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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싱하는 여자다[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70]

나는 복싱하는 여자다. 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딱히 없다. 남편이랑 길 가다 구경이나 해 볼까 하며 복싱 체육관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복싱 체육관의 관장님은 혈기 넘치는 근육질의 코치일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인도에 떨어진 지 2년차에 접어드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삐죽삐죽한 긴 단발의 전형적 복서 헤어스타일에 키는 크지만 앙상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전설의 권투 만화, ‘내일의 조’에 나오는 천재 복서 ‘조’의 이십 년 뒤쯤 모습으로도 보였다.(조는 선수생활을 접고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타락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체육관에 적을 두고 있으므로) 남편이 관장과 상담을 하는 사이 나는 관장실 벽에 걸린 사진을 구경했다. 벽면에는 전직 국가대표선수였다는 관장의 ‘화려한 시절’과 ‘영광의 순간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젊고 패기 넘치는 복서와 로빈슨 크루소 관장이 동일 인물임은 믿기 어려웠지만 나 또한 이십 년 전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이 변해 왔겠는가. 그 당시 나는 무지하게 젊었었다. 육아니 살림이니 시댁이니 직장이니 학부모니 하는 것들이 다 뭐야. 나는 그저 의욕에 넘쳤고 늘 꿈을 꿨으며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동시에 막연함과 두려움, 그리고 주저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지만.

비슷한 사진 구경하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기도 했고 복싱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은 나는 이제 그만 체육관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건성으로 체육관을 휘 둘러보았다. 체육관 한쪽 전면은 거울로 돼 있고 그 위쪽에는 큰 글씨로 ‘오늘 내게 닥친 한계는 내일의 성공의 디딤돌일 뿐이다’라고 쓰여 있는 간판 같은 게 걸려 있다. 멋있는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피곤한 느낌이 드는 건 내가 이미 성공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까닭일까. 솔직히 그땐 복싱으로 무슨 한계를 맞이하며 그것이 어떻게 성공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묵묵히 땀을 흘리며 스텝을 밟고 있는 뚱보 관원은 인상적이었다. 그의 상의는 땀으로 적셔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남편은 운동비를 결제하고 있었다. “일단 한 달 먼저 등록할게요.”하며 카드를 관장에게 건네주고 있는 게 아닌가. 자기는 이미 하는 운동이 있으니 나더러 한번 해 보라고 하면서. 나는 일단 하고 보자는 행동파 남편 덕분에 망설일 시간조차 놓치고 만다.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자꾸 겪다 보면 ‘에라, 모르겠다. 뭐 그러든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편안해진다. 그리고 미지의 상황에 나를 맡기는 순간의 짜릿함이 밀려오고 못할 게 뭐야 하는 용기가 난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 어떻게든 그것을 해내고 마는 경우가 있다. 때로 시간이 좀 걸리거나 시행착오를 겪긴 하지만 그건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 하지만 나는 오래된 버릇을 못 버리고 좀 버티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굉장히 신중하게 생각하는 얼굴로 이번처럼 ‘음.... 어쩌지? 흠....’ 하고 시간을 끄는 것이다.

   
▲ 남편이랑 길 가다 구경이나 해 볼까 하며 복싱 체육관에 들어가 보았다. ⓒ김혜율
그때 전직 국가대표 복싱 선수인 관장이 잽을 날리듯 끼어들었다.

“아시죠? (결제했으니 이 뒤로) 환불은 안 됩니다.”

아, 그건 마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듯’ 나를 쓰러뜨리는 한마디의 결정타였다. 그렇다면 복싱을 하는 수밖에 없군. 나의 망설임은 한 달 운동비 10만 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요 근래까지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꾸역꾸역 한 게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이유도 매월 자동이체로 회비가 결제되는 시스템이라 중간에 해지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인 걸 보면 나는 역시 선결제가 있어야 운동을 하는 인간인 것 같다. 여튼 덕분에 어느 정도의 기본 체력은 유지하고 있으니 만족한다. 아이 키우면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 다들 그렇지 하고 이해해 준다. 잠잘 시간,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한데 운동이라니 사치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하면 운동도 할 수 있다. 내 경험상 고단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오더라. 그리고 건강해진 몸과 마음은 일상생활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운동을 하는 엄마는 아이를 더 잘 키우게 되고, 살림을 더 잘하게 되며, 부모를 잘 봉양하고, 의료비 지출을 줄이며, 매일 저녁 가족들을 위해 더 맛있는 식사를 만든다는 경향이 어딘가엔 분명 있을 것이다. 이때 어떤 운동을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설령 그것이 생전 처음 해 보는 복싱이라는 운동이라도 말이다. 해 보고 아니면 그때 가서 그만하면 되니까.

그렇게 복싱을 시작한 지 3주가 되었다. 3개월도 아니고 고작 3주 가지고 복싱을 하니 어쩌니 한다고 우습게 볼 지 모르지만 진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게 박수를 힘껏 쳐 주리라 믿는다. 원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이런 나의 무모함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리라 여기고.

나는 복싱의 복자도 모르고 일단 뛰어들고 본 사람 중 하나다. 복싱은 그냥 치고 받고 싸우는 경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샌드백이건 스파링 상대건 관장이 들고 있는 미트건 실컷 두들겨 패서 스트레스를 날리면 좋겠네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펀치 한 방에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과도한 근심 걱정을,
펀치 한 방에 점점 나이들어 가며 약해지는 것들에 대한 묘한 서글픔을,
펀치 한 방에 내 몸통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군살들을,
펀치 한 방에 그때 왜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펀치 한 방에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 주는 모든 것들을,
빵! 빵! 시원하게 다 날려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바람은 복싱 첫날부터 한 켠에 고이 개켜 두게 된다. 펀치 한 방을 날리는 것보다 내가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 먼저였다. 나를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복싱 첫날, 나는 복장부터가 불량이었다. 첫날인데 뭐 어렵고 대단한 걸 하겠나 싶어 조금 쌀쌀한 봄 날씨에 맞춰 입고 온 골덴 바지를 입은 채로였다. 하지만 그것을 입은 걸 후회하기까지 단 3분이면 충분했으니. 복싱은 시간에 맞춰 체력을 단련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스포츠였다.

우선 간단히 몸을 풀고 줄넘기를 한다. 3분간 줄넘기를 하고 30초 제자리 뛰며 주먹 날리기 하고 30초 쉬기, 이것을 한 라운드라고 하고 총 3라운드를 뛰어야 한다. 별로 안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 해 보면 당장 때려치고 싶어질 만큼 힘들다. 줄넘기 하는 3분이 30분처럼 여겨진다. 줄넘기가 끝나면 스텝 연습을 하는데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3분간 제자리서 콩콩 뛰어야 한다. 역시 3분 하고 30초 쉬는 걸 반복한다. 스텝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 한다. ‘뛰어, 쉬지 말고 끝까지!’ 라고 관장이 외치면 관원들이 “화이팅!”하고 답한다. 이것도 크게 힘들 것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해 보면 안 그렇다. 복싱 따위 모르는 채 핫도그가게 앞에 줄 서서 갓 튀겨진 바삭한 핫도그에 설탕을 뿌리고 케첩과 머스터드 소스를 발라 먹을 순간을 기다리는 체육관 바깥 세상이 너무도 그리웠다. 땀복도 아니고 무려 골덴 바지를 입고 뛰는 나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평소 땀을 잘 흘리지 않던 내가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땡볕 아래 운동회 연습할 때 흘리던 땀을 다시 흘리고 있었다. 관자놀이께로 줄줄 흐르는 땀, 이마로 내려와 눈썹에 걸려 뚝 하고 떨어지는 땀. 와,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내가 이제 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아 참, 미리 결제한 운동비 때문이구나. 에잇, 다시 힘을 내자!

   
▲ 체육관 한쪽 전면은 거울로 되어 있고 그 위쪽에는 큰 글씨가 걸려 있다. ⓒ김혜율

관장님은 시키는 대로 성실히 훈련에 임하는 나를 기특히 여기시고 자세를 계속 교정해 주신다. 그리고 새로운 동작을 알려 주신다. 주먹을 쥐고 어깨 수평선에서 약간 위를 향해 팔을 죽죽 뻗는 잽은 상박에 있는 지방을 태우면서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강하게 만든다는 복싱 동작이란다. 프로 출신 관장님의 1:1 가르침은 계속되었고 그런 고급기술을 소화시킬 역량이 차마 안 되는 나는 차라리 관장님 앞에 무릎을 꿇고 ‘체육관 청소부터 하겠습니다.’ 할 뻔했다. 청소 1년, 줄넘기 1년, 스텝 밟기 1년, 잽 1년, 원투원투 1년, 그렇게 3, 4년 바닥부터 철저한 기본기를 쌓아 결국 세계챔피언이 된다는 시나리오. (정말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법이다.)

그런데 관장이 흐르는 땀으로 눈조차 뜨지 못하는 내 상태를 보더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첫날 치고 매우 잘하시네요.’한다. 숨이 찬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며 체육관 바닥 저편으로 쓰러지듯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곧이어 추가 체력보강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덤벨 들기. 윗몸일으키기, 스쿼트, 런지, 버피 같은 것 말이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하면서 따지고 싶었지만 여기저기 보이는 관원들의 숙연한 모습에 자극받아 닥치고 운동했다. 관원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 중이었다. 조만간 전국대회에 출전할 것만 같은 한 아저씨는 샌드백을 그야말로 때려 패고 있었고, 한 젊은이는 거울을 보며 섀도 복싱에 한껏 열을 올리고 있었다. 홀쭉이 관원이 뚱보 관원 못지않게 땀을 흘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한쪽 구석에선 선수 지망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삼십 분째 코치의 꾸지람을 듣고 있다. 물론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스마트폰만 해 대는 중고등학생들도 있었다. 철저한 자유방임적 분위기에서 각자 알아서 운동을 하는 분위기. 남편은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체육관 운영 방식이라 했다.

나는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빠르게 적응했다. 그 다음 날에도 청바지를 입고 운동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셋째 날부터는 타이즈를 준비했다. 그후 집에서건 길에서건 잽! 잽! 원투!를 하는 내게 남편이 할 만하냐고 묻는 순간이 왔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전에 하던 운동은 복싱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고, 복싱을 하게 된 이상 계속해 볼 거라고. 허나 운동이 상상 외로 힘들기 때문에 딱히 권하고 싶진 않다고. 그러니 섣불리 해 보겠다고 생각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했다. 다만, 운동이 끝나고 난 뒤 밀려오는 상쾌함도 그에 비례해 큰 건 사실이라고도 덧붙였다. 복싱을 하고 체육관을 나와 비척비척 걸어 나올 때는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할 보물 하나를 가슴속에 간직한 기분이라고.

결국 남편은 내가 그리 말렸는데도 복싱 체육관 등록을 조만간 앞두고 있다. 그래, 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그건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링 위에 올라 우리가 함께 스파링을 하는 날도 오겠지. 체급이 워낙 달라 내가 일방적 공격을 하고 남편은 방어하는 것에 그치겠지만 그건 그대로 또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매서운 주먹을 준비해 놓아 모두를 놀라게 할 참이다. 그때는 내가 스스로 버티고 서 있는 힘을 가진 것은 물론, 뻥, 뻥 하고 날려 버리고 싶은 것들마저 죄다 날려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난 뒤일까.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어쨌든 나는 복싱하는 여자, 복싱하는 엄마, 복싱하는 아내라는 점이다. 3주밖에 안 되었건, 3개월이 되었건 3년이 다 되가든, 복싱을 한다는 것은 동일하므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라는 호칭보다 도전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타이틀이 훨씬 마음에 든다. 어쩌면 쓰러지고 싶은 걸 참고 끝까지 버티고 서 있는 내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매일 한계에 부딪히지만 그때마다 디딤돌을 하나 놓아 가는 중이라는 걸 복싱을 통해 배워 나가고 있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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